책과나무

HOME도서정보도서관련기사

도서정보

도서관련기사

중앙일보

밸브 돌리기전 그의 말이 걸린다…조력자살 지켜본 작가의 소회

2023-04-04

그날의 기억은 두려움과 무력감, 죄의식이 버무려진 모호한 감정과 함께 소환된다. 눈앞에서 한 남자가 홀연히 목숨을 버렸고, 죽음의 침상을 둘러선 우리 일행은 허탈함에 망연자실했다. 스스로 주입한 약물이 곧바로 돌아 남자의 고개가 툭 떨어지자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던 동행들의 노력도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저렇게 가려고 이 먼 길을… 우리는 고인의 발치에 서서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린 후 고인만 남겨둔 채 방을 나왔다. 시신을 화장할 때 함께 태우기로 한 그의 검정 점퍼와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비로소 눈물이 났다.

2021년 8월 26일 한국시간 오후 7시쯤, 폐암을 앓던 64세 한국 남성이 스위스 바젤의 비영리 안락사단체 ‘페가소스’에서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페가소스는 2018년, 호주 최고령 과학자인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곳이다.

 

수년 항암치료, 마약성 진통제도 안 들어

 

고인은 평소 자신의 인생을 ‘아무리 재미있어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 책’이라고 비유했다. 60세가 지났으니 더 산댔자 지난 시간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비유대로 스스로 ‘생의 책장’을 덮었고, 편도 티켓을 쥔 그의 짧은 스위스 여정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두렵지는 않은데 어릴 때 달리기 출발선에 섰을 때처럼, 아니면 대중 앞에서 연설하기 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어떤 면에서는 설레기도 하고요. 오늘 밤엔 잠들지 않으려고 해요. 생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내고 싶진 않으니까요. 모든 순간을 깨어서 지켜보고 느껴보려고 해요. 지상의 모든 순간, 모든 마지막을.”

 

조력사하기 전날 밤, 이렇게 말했던 그는 지금 충남 공주의 한 수목원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기사원문보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52337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글을 통해서였다. 내 글의 오랜 독자라고 했지만, 그전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 인연에 기대어 조력사를 결행하기 5개월 전, 스위스로 동행해 줄 수 있을지, 자신의 조력사 과정을 책으로 내줄 수 있을지 부탁을 겸해 타진해 왔다.

 

나는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란 제목으로 4박5일의 동행 체험기를 냄으로써 고인의 두 가지 부탁을 모두 들어드렸다. 그럼에도 돌아가신 분과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을 다녀온 후 뜻하지 않게 조력사를 반대하는 입장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올 수 있고, 그 선택은 그 누구도 강요하거나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출구 전략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