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석에 앉아 눈을 감자 /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모호한 시선
잠깐 실눈을 하고 / 주위를 둘러보는데
알 듯 모를 듯한 가냘픈 여인 / 묘한 미소가 가슴을 두드린다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 후다닥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 남방셔츠 단추와 단추 사이 / 비집고 나온 두툼한 뱃살이 뻔뻔하다
아차! /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니
나를 설레게 한 그녀의 엷은 웃음 / 모호함이 아닌 헛헛한 냉소였음을
_「착각의 끝」(p.15) 중에서
책가방 어깨 메고 재잘재잘 앳된 소녀들 / 화장기 얼굴 옷맵시는 어른 흉내
짝지어 걸어가며 종알종알 / 손바닥 마주치며 깔깔깔
… 폐지 줍던 백발노인 / 한가득 짐 싣고 삐거덕삐거덕
젖은 솜처럼 몸은 무거워도 / 함박웃음 싱글벙글
… 유모차 탄 한 살배기 / 바깥세상 눈 굴리며
두리번두리번 / 옹알옹알
… 오늘도 붐비는 길거리 /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_ 「길 위의 사람들」(p.45) 중에서
생전에 쌓은 허물 / 스스로 허물지도 못한 채
얼음장 같은 가슴을 / 업보로 되돌려받고
남의 품에 / 내 분신(分身)을 넘겨야 하는
숙명의 / 탁란(托卵)
… 고해(苦海)의 숲속에선 /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이 봄 / 오늘도
뻐꾸기는 / 숨어서 운다
_「뻐꾸기는 숨어서 운다」(p.67) 중에서
소금 한 되, 등잔기름 1병, 비누 2장 / 꼬깃꼬깃 지폐와 쪽지를 건넨다
품앗이를 주고받고 / 일용품을 장만한다
마침내 / 집집마다 마련한 먹거리
거뭇거뭇 나무 밥상에 펼쳐 놓고 / 느긋한 만찬을 즐기는 가족들
… 긴 하루가 /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희미한 등잔불과 호롱불이 꺼지고 / 섬마을은 자취를 감췄다
… 쏴아 하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 / 엄마의 자장가 되어
고요한 섬마을을 / 다독다독 잠재운다
_「섬마을 풍경 1962년(Ⅳ)」(p.9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