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고 홀트라는 미국 사람이 나타나서 아이를 부자 나라에 데려가 밥을 먹여 주겠다는 거야. 한국 부모로서는 한줄기 빛이었고 살려만 주면 어디든 보내겠다는 심정이었어.
이름 없는 풀을 먹다 죽어 나가던 시대에 아이를 굶기지 않는다면 평생 못 보고 사는 것쯤이야 견딜 수 있었지. 눈앞에서 자식이 굶어 나가는 꼴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자식을 보낸 부모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할 수 있었어.
그렇게 살아야 견딜 수 있었거든.(13쪽)
“절하세요.”
아까 신발로 참견한 아주머니가 또 한마디 했다. 뤽은 한국말을 못해서 입을 다물었고 절을 할 줄 몰라서 뻣뻣하게 서 있었다.
“I don't know how to bow(할 줄 몰라요).”
“Then follow me(그럼 저 하는 대로 따라 하세요).”
“I don't want(하고 싶지 않아요).”
“Why(어째서요)?”
“Because I'm French(나는 프랑스 사람이니까요).”
“Korean funerals require bowing(한국 장례식은 절을 해야 해요).”
“Actually, I don't want to show my ass to people(사실 전 엉덩이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풋.”
미선이 웃음을 터뜨리자 사람들이 쳐다봤고, 미선은 얼른 입을 막았다.(16~17쪽)
뤽은 분명 한국말을 하고 글씨도 쓸 줄 아는 한국 나이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긴 고통과 함께 옅어져 갔고, 마침내 그는 한국말은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이방인이 되었다. ‘해외 입양’이란 ‘여행’도 아니고 ‘유학’도 아니고 일종의 ‘탄생’이다. 탄생의 고통을 기억한다. 뤽은 신생아가 아닌 어린이였다. 무서웠다. 삶은 이어졌지만 배 속 기억을 잊듯 한국에서의 기억을 잊기란 쉽지 않았다.(21쪽)
“나는 왜 아빠랑 피부색이 달라요?”
“콜라랑 스프라이트도 색깔이 다르지만 둘 다 맛있지 않니?”
“다른 친구들은 부모랑 피부색이 같던데요.”
“혀를 내밀어 봐라.”
꺄린이 ‘메에~’ 하고 혀를 내밀자, 아빠가 거울을 보여 주며 혀를 내밀었다.
“아빠랑 꺄린이랑 혀 색깔이 똑같지? 피 색깔도 똑같고, 손바닥 색깔로 비슷하구나.”
“정말 그렇네요. 나는 아빠랑 똑같아요.”
“심장 색깔도 똑같고, 뼈 색깔도 똑같단다.”(61쪽)
“내 엄마는 어디 있나요?”
스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시더니 “하늘을 봐라.”
사람들이 전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움직이고 있다. 구름이 사라진다 해도 없어진 건 아니다.”
모두 천천히 말하는 스님의 말씀을 조용히 기다렸다.
“비의 모습으로 네 옆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놋쇠 그릇을 울려 그 소리가 퍼지게 했다.(69쪽)
생존을 위하여 언어와 문화는 다 잊었는데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는 말은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든 이론일 것이다.
그리움은 모래와 같아서 가라앉아 물을 다시 맑게 할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리움은 출렁이면 물이 흐려지니까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할 뿐이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너무 조용한 감정이라 사람들은 때로 그것이 사라진 줄 안다.(121~122쪽)
청소년기의 미자는 입양보다도 돈을 벌기 위해 서류를 조작해 보내졌다는 것에 분노했다. 아동의 권리는 박탈하고 겉으로는 민주주의인 척하는 한국이 꼴 보기 싫었다. 미자는 사춘기 때 한국을 더욱 증오했다. 한국이 수출대국으로 떠올라도 그녀는 빈정거렸다. 그들이 자신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년이 된 지금의 미자는 한국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무시당한 그녀의 외침’에 대한 응어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