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작정 산을 가로질러 올라갔다. 하얀 물체를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길도 없는 산비탈이었다. 이리저리 얽힌 나뭇가지들 때문에 앞으로 나가기 힘들었다. 발밑에 쌓인 낙엽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나는 나무둥치들을 끌어안고 돌며 앞으로 나갔다. 들어갈수록 무성한 숲이 앞을 가려 하얀 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그것처럼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나를 가로막는 역경을 헤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산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랐다. 비탈은 가파르고 산봉우리는 높게 보였다. 키 높은 상수리나무와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 그리고 소나무들이 빽빽했다. 나무숲 위로 보이는 하늘색이 점점 파래지지만 숲속은 어두웠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을 뛰쳐나와 서울역에 처음 내렸을 때처럼. (11쪽)
건물마다 붙어 있는 간판에는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중앙통제실에서 각각의 식물마다 필요한 온도와 습도, 빛의 밝기, 거름의 양을 자동으로 조절해 최상의 품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남자는 길을 잘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도 농장 지대를 지나 영산에 갔었다. 남자는 기억을 더듬는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영산이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정신을 맑게 해 주고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싱그러운 꽃들,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이 삭막해진 가슴을 적셔 주었다. 생명의 숨결이, 숨죽이던 영혼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산은 보이지 않는다. 도로 양쪽으로 줄지어 선 건물들이 영산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75쪽)
사내가 오동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말매미들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어린 시절 매미채를 들고 오동나무를 오를 때와는 딴판이다. 그때는 매미들도 조심조심 울었다. 사내가 오동나무 그늘에서 광장을 바라본다. 광장의 땡볕들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땡볕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칼을 던진다면…… 사내는 떠오르는 생각에 다시 광장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날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모여드는 땡볕들만 소란스럽게 웅성거리고 있다. ‘우리는 그날의 범인을 알고 있지. 우리는 그날의 범인을 알고 있지.’ (134쪽)
너는 그래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현상들을 사진으로 찍어 종합하면 암실의 현상액 속에서 영상이 떠오르듯 본질이 나타날 것 같았다. 인물 사진을, 아기에서 노인까지 촬영해 인상하면 인간의 희로애락의 형상이 나타났다. 네가 철학을 전공하면서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애는……? 인화지에 나타난 인애의 나신은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명화(名畫)였다. 얼굴과 몸매 모두 세상에 없는 명작이었다. 그러나 영혼은……? 더럽게 훼손되어 있을 것이다. 너는 친구의 말을 믿지 않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애가 믿는 천주교의 엄숙한 미사에도 정화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인애는 신부님이 높이 들어 ‘이는 그리스도의 몸’ 하는 과자도 받아먹었다.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받아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본질의 변화는 가능한가? 알 수 없다. 너는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1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