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도우미 구인 광고를 올렸는데, 그걸 보고 삼 일 전에도 찾아온 사람이 있었어요. 아가씨의 얘기를 듣기 전에 우리 집을 찾아온 그 젊은 남자 얘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혹시 다른 약속이라도 있나요? 없다면 좋아요. 마음 놓고 얘기해도 되는 거겠죠. - 13쪽
사람의 말이란 게, 고백이란 게 그토록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인 줄은 그때까지 몰랐어요. 지난날을 허심탄회하게 가감 없이 털어놓는 엄마는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는데, 마법 같은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만들었죠. 엄마의 고백에 내가 알던 나는 사라지고 나조차 완전히 낯선 내가 그곳에 새롭게 태어난 거예요. - 48쪽
그 자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잘못을 뉘우친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지 못해 괜한 짓을 했다는 뜻이었어요. 시간만 버렸다고. 내 생명이 만들어지는 찰나였던 거죠. - 70쪽
경찰국장의 딸이 유괴돼 사회는 시끄럽고, 다른 사건들에 대한 수사는 허술했다.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에 신참인 난 불만을 품었지. 욕실 문이야 안에서만 잠글 수 있다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도 얼마든지 욕실을 밀실로 만들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유치원 꼬마도 아는 거지. - 90쪽
우리의 조가 얼마나 멋진 일을 계획했는지, 어떻게 이뤄나가고 있는지 듣다 보면 절로 흐뭇하고 통쾌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장담해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까요? - 124쪽
전화가 또 왔어요! 네? 저 보고 받으라고요. 진심이세요? 어머, 좋아라. 고작 전화 한 번 받는 건데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나네요. 제 소원이 이렇듯 쉽게 이뤄지다니. -137쪽
“아하. 저 여자 앞에서 가짜 애인 노릇이라도 해달라, 뭐 그런 뜻이야?”
“마누라 행세면 더 좋지.”
“맨입으론 안 돼. 저 여자 가고 나면, 그땐 나랑 진짜 연애하는 거다? 대번에 정색할 거면 부탁은 왜 해? 그냥 저 여자한테 확 불어버린다. 오빠가 내숭 떨고 있다는 거.”
“그러지마, 제발. 내 다리가 안 보여? 간신히 지탱하고 있잖아.” - 165쪽
어느 지역신문의 사회 코너에 실린 쪽 기사가 발단이었다. 버스에서 껌과 볼펜을 파는 귀공자가 있다는. 그런 물건을 파는 사람은 잘 생기면 안 된다는 법안이 비밀리에 통과되었을 리도 만무다. - 208쪽
무엇이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 도망치기만 했냐고요? 글쎄요.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뿐이네요. 어머니 살아생전에 눈 마주치고 속삭이는 대화를 나눴으면 됐는데. 좋아하는 복숭아를 가끔씩 사드리면 됐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어머니는 충분히 행복해하셨을 텐데.
- 262쪽
손바닥만 한 복권방에서 나는 손님을 맞이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로. 눈 뜬 장님이 되어서. 멀쩡한 귀를 갖고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어서. 아리는 통 연락이 없다. 란과는 곧잘 전화를 주고받았었는데 그조차도 없는 눈치다. - 2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