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때마다 우리는 해결을 위한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은 예기치 못한 결과와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도, 풍토 순화를 위한 노력도 모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던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자연 재해나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내는 길은 긍정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지진 복구 작업이 한창인 상처투성이의 크라이스트처치, 다시 시작한 도시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았다.
(80쪽, 「재난을 이겨 내는 희망의 Re: Start!」」
나는 카프카처럼 나의 일상을 벗어던진 채 내부로 여행을 하다가, 현실 세계에서 사라진 후 무의식 속에서 늘 찾고 있던 어머니와 마주친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감성적 체험은 그 자체가 현실과 가상적 현실을 넘나들며 경계선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어쩌면 바로 이런 강렬한 체험을 꿈꾸며 여행도 하고 글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났던 새는, 내가 어머니임에 틀림없다고 느낀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저 한 마리 새였을 뿐이라고 여겨도 상관없지 싶다. 영혼으로 함께 존재하는 더불어 있음이 사랑이라고 여기며 바닷가에서, 숲에서, 들판에서, 이 세상 자연 속에서 사랑의 실존을 체험하고 싶은 인간들의 희망이 되돌아가는 파도 위에 빛났다.
(98-99쪽, 「새, 엄마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
“태즈메이니아 어때요?” 하고 물으면 “맑고 깨끗한 물 같은 곳이에요.” 하고 삼십 년 이상 대답해 왔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물. 모든 것을 씻어서 깨끗하게 정화 시킬 수 있는 물. 늘 오고 가는 그 물길이 맑아서 해변의 모래마저 애기의 피부처럼 하얗게 보드라운 곳. 순한 해변에 하늘이 머물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세상이 아름답게 비추이는 곳이라고 말한다. 때 묻지 않은 바람에 들려오는 소리 또한 공해가 없는 곳. 버티어 선 나무가 올곧은 선비처럼 거짓이 없고, 어린 펭귄이 걸음마를 연습하는 해변이 평화롭다.
(130-131쪽, 「빛과 모습 그리고 태즈메이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