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번의 글쓰기 동안 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쓰고 싶지만 쓰지 못했던 게 있었다고, 이제는 고백하고 싶다. 이야기의 주제가 삶이든 일이든 관계이든 추억이든, 뭐가 됐든, 그런 것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어쩔 수 없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로 연결되고 그건 삶의 종착지인, 단어를 쓰는 것조차 두려운,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결국 삶과 죽음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으로 연결된다. 그런 쪽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지적 한계와 두렵고 우울한 기운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동안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거나 가볍게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은,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삶의 끝인 죽음을 얘기하지 않고 어찌 삶을 얘기할 수 있을까. 특히 나처럼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게 남아 버린 사람들은 죽음과 좀 더 친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죽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P.10~P.11 ‘세 번째 배낭을 꾸리며’ 中)
4시 반쯤 갑자기 새벽의 정적을 깨며 전화가 울렸다. 순간,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통해 들은 내용은 내가 예상한 불길한 느낌을 넘어섰다. “네팔에서 온 근로자가 방금 전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난 다리가 떨렸다. 무서웠다. 겁이 났다. 근무복으로 갈아입으며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썼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중략)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왜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몇 번만 들어가면, 결국 다 사람을 위해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지 않을까. 사람을 위해 일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다. 모든 생물체의 종착지 죽음. 죽음이란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것들에 비하면 내가 하는 일은 하찮은 것일까. 내 삶은 살아야 할, 혹은 버텨야 할 가치가 있는 걸까. (중략)
알베르 카뮈의『시지프 신화』생각이 났다.『이방인』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음’이라는 주제에 은유적으로 다가갔다면,『시지프 신화』는 용감하게도 ‘자살’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던지며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뤘다. 카뮈는 자살이라는 주제만큼 본질적인 질문은 없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그 주제는 결국 ‘인간의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질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하는 진리조차도 자살이라는 주제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했다.
(P.18~P.22 ‘죽음’ 中)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카뮈의『시지프 신화』, 좀 더 얘기해 볼까.
시지프는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다. 형벌은 ‘부질없는 무한 노동’. 바위를 산 위로 굴려서 올린다. 산 위에 바위가 다다르면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온다. 시지프는 다시 내려와 산 위로 바위를 올린다. 의미 없는 이 짓을 끝없이 계속해야만 한다. 이 신화는 누구나 다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근데,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시지프에게 이런 형벌을 준 걸까. 시지프는 절대자가 죽음을 명했지만 삶을 연장하기 위해 그 명령을 거부했다. 더 살고 싶어서 명령에 항거했고, 그래서 지옥에 떨어졌다. 삶의 열정이 죄목이다. 그렇다면, 형벌이 정말 심오하고 가혹하다. 어쩌면, 가장 삶에 가까운 형벌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는 죄의 응징이 되었다.
(중략)
또 한 가지 우릴 설레게 만드는 건 삶의 가치가 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기쁨이 앞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즉 삶의 기회가 남았다는 것, 나에게 주어진 것을 아직은 다 소진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 자체로 기쁨이지 않을까.
(P.45~P.50 '바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