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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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닷물이 명이네 보금자리로 밀려들어 온다. 걸쭉하고 탁한 붉은색과 비릿한 냄새에 알 수 없는 악취가 섞여 있다. 자신의 하얀 솜털을 휘감아 오는 끈적임에 명이는 진저리를 친다. 명이는 어느새 불그죽죽한 빛깔의 흉한 아기로 변했다. 동굴 입구로 검붉은 반점이 군데군데 섞인 허옇고 벌건 덩어리가 둥둥 떠내려간다. 냄새와 끈적임의 정체가 저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린 명이의 머리에 언뜻 스친다.
바람을 타고 “아윽 아윽” 하는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 덩치 큰 어른 강치들의 처절한 울음 속에 가녀리고 애처롭게 울부짖는 아기 강치들의 공포에 찬 신음 소리가 섞여든다. 가제바위 저 너머에서 강치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치 사냥꾼들의 학살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린 명이는 알 턱이 없다. - 79~80쪽
강치들은 작살을 몸에 꽂은 채 죽어 가는 상태에서 머리부터 꼬리 쪽으로 죽죽 가죽이 벗겨진다. 강치들의 붉은 피가 바위와 해안 풀숲을 흥건히 타고 내린다.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들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도려내진다. 뒤이어 그물 속 어린 강치들의 분류 작업이 시작된다.
친구들과 부모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에 이미 정신을 잃고 숨이 멎어 버린 강치들도 있다. 하얗고 윤기 흐르는 털은 피로 물들어 이미 붉은색으로 변했다. 엄마 강치들의 우아한 털도 온통 핏빛으로, 아빠 강치들의 검고 건강한 피부도 피칠갑을 한 상태다. 드디어 명이의 오빠에게 작살이 꽂혔다.
자연은 명이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의 부모들이 차례차례 학살되는 것을 이미 지켜보았다. 명이 엄마의 머리에 몽둥이가 내려쳐질 때 자신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끔벅끔벅 의식을 잃어 가는 명이 엄마의 눈에 피눈물이 괴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자연은 느낄 수 있었다. - 87~88쪽
“좋아요. 그렇다면 왜 우리를 일부러 잡아 와 놓고 잘 돌봐 준다고 하나요? 우리는 어차피 평화롭게 잘 살고 있었어요. 우리 중 누가 여기 오고 싶다고 한 적 있나요? 이곳은 마치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은 후, 자기 딴에는 정성껏 돌보는 유괴범의 소굴과 같아요. 그것이 어떻게 사랑인가요? 또 우리를 인간들이 보기 원했다고 핑계를 대겠죠? 그러면 인간들이 우리를 만나러 올 수는 없었나요? 아프리카에 와서, 바다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들을 볼 수도 있었잖아요. 우리는 인간을 구경하려고 인간 엄마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아프리카로 데려오지는 않잖아요. 바닷속으로 강제로 끌고 가지도 않잖아요. 인간들은 다만 우리를 잡아다 보여 주면서 돈을 벌고 싶을 뿐인 거잖아요.”- 103~104쪽
“생명아, 너는 할 수 있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할 수도 있을 거다. 바다로 나가게 되면 그간 네가 헷갈려하고 혼란스러웠던 일들에 저절로 답이 주어질 거란다. 왜냐하면 늘 말했듯이 바다는 생명이 처음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지. 바다는 네게 생명을 나눠 주었단다. 그래서 넉넉히 너를 다시 품어 안을 거고, 거기서부터 너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될 거야.”- 143~144쪽
“생명아,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도 괜찮다. 그리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엄마 아빠가 평소에 한국말로 대화하는 걸 너도 다 알아들었잖아. 대한민국 가까이만 가면 사람들이 너를 반길 거야. 아마도 부산이었던 것 같아. 부산, 울릉도, 독도 이렇게 올라가면서 한국 관광객이나 어부들을 만나게 될 거야.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독도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리고 우리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지.
다만 일본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 한단다. 일본이 우리를 학살한 것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모습을 드러내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른단다. 다행히 너는 남자라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하얀 털 강치는 아니고, 지금이야 전쟁 때가 아니니 가죽이나 기름을 얻자고 너를 잡지는 않을 거야.”- 152쪽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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