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스름이 땅강아지처럼 스멀거린다. 와온 저녁, 닻을 내리는 선창 부근이 코발트 빛에 부스스하다. 온종일 바다는 쪽물을 우려내어 저고리 치마를 저리 널고 곱게도 차렸다. 어둠에도 눈이 저리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저물녘, 이름 모를 섬들이 부표처럼 햇살을 먹고 있고 해넘이는 치맛단에 치자 물을 듬뿍 적셔 벅벅 붓질해댄다. 헐렁한 거미줄에 내다 건 내 생의 반음표가 나부낄 수 있다면 당장 소슬바람이어도 좋겠다. 반나절 바짓가랑이에 스며들어 광풍으로 솟구쳐도 춥지 않겠다.
와온은 저녁에 내린다. 운주사 와불이 되어 누워 있는 바다, 눕기 위해 누워 있는 갯벌을 만나러 곳곳의 진객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이카로스 날갯짓에, 갯고둥 수만큼, 마른 헛기침도 없이 꽁무니에 길을 달고 물어물어 온다. 배낭에는 네비게이션에 다 닳아진 칫솔, 족집게에 가까운 일회용 면도기, 샘플 화장품, 제 몸뚱이보다 큰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도 있다. 그냥 유랑을 간식 삼아 떠돌아다닌다는 나홀로족에, 진짜 원조 짱뚱어 맛을 담아가겠다는 식객들이 저녁 와온 따뜻한 바다에 등을 눕히기도 한다. 여기에 아예 시동을 끄고 억새 무덤의 풀벌레처럼 묵화를 읽는 사람도 뭉게구름에 조심스럽게 앉아 있다.
(78쪽, 「풍경이 숨 쉬는 창」)
천년고찰 선암사 해우소 옆에 홍매화가 낭자할 때는 아무리 바빠도 만사 때려치우고 가야 한다. 시름과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일수록 홍매화 양지쪽에 앉아 거친 가지에 박힌 삼월의 하늘을 우러르며 꽃술 한 모금 맛볼 일이다. 예비한 꽃자리가 따로 없으니 당신이 앉는 자리마다 꽃이요, 온기이니. 냉기 때문에 주저한다면 가는 길에 들러 녹차 한 잔 비비면 온 산이 따뜻해지니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훌쩍 떠나 보시라.
시름을 털어 내는 장소로 선암사 해우소만큼 여유로운 곳이 없다. 유명세는 이미 자자하니 선암사 입구 서어나무에 기대어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시라. 행여 해우소 틈새로 기어드는 햇발은 생의 찬란함을 응시하는 기운이요, 와송 또한 자비로운 생을 엮어 가는 또 다른 해탈일지니 꺼림칙하다고 머뭇거리는 일은 당신의 번뇌가 매우 온당치 않다는 표징이다. 말끔히 버리지도 못하면서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은 나 혼자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도 애써 털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삼월의 백련사 동백꽃잎처럼 이리저리 널려 있으니 이 또한 어찌할까?
아직도 바람이 꽃을 시샘한다며 다시 꺼내 든 외투가 걸쩍지근하다. 그동안 혹한에 물든 탓도 있겠지만 삼월의 햇발은 어김없이 옷깃 속으로 파고든다. 무당개구리를 핑계로 나무 혈관을 뚫어 피를 빨아 먹는 족속이 아닌 바에야 홍매화 아래서 잠시나마 온기를 나눠 가져야 한다. 자고 나면 일가족이 생명을 팽개치고, 친족이 친족을 멸하는 피의자 수갑, 청년실업을 미끼로 포악질을 해대는 가진 자의 횡포 때문인지 올봄이 이렇게 더디게 온다.
(124쪽, 「선암사 해우소 옆 홍매화」)
와상에 차린 두레 밥상에 앉는다. 고개를 돌리니 돌담 아래 봉숭아가 제철을 맞아 옷매무새를 단장 중이다. 소박하기가 시골 누님 같아 바라볼 때마다 편안하고 느긋하다. 자생력이 무척 강한 봉숭아는 마당 장독대 옆에서, 절간 처마 밑에서 피어나고, 초가집 낙숫물을 뒤집어쓰고도 꼿꼿한 자태를 뽐내는 게 여간 질긴 놈이 아니다.
봉숭아 하면 떠오르는 게 손톱인데 물든 주황빛이 오묘하다 못해 신비감을 자아낸다. 도저히 매니큐어가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햇살이자 숨결이기도 하여 옛 선조들이 즐겼을 현대판 네일아트다. 그런데 봉숭아 꽃물을 언제 들이마셨는지 나팔꽃 넝쿨이 벌겋게 얼굴을 내민다.
봉숭아만큼이나 여름의 운치를 더하는 게 있다면 호박잎이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치거나 찐 후, 조선간장에 찍어 밥 한 숟갈 떠 넘기는 맛이야말로 입맛 가신 더위를 쫓는 특별 보양식이다. 굳이 조선호박 무침만이 최고라고 당신이 고집 피울 일도 아니다.
(246쪽, 「휴(休) 그리고 Es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