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91년에 발발한 동맹시 전쟁은 BC 90년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제안으로 로마 시민권이 동맹시로 확대됨으로써 사실상 끝났지만, BC 88년 마지막 전란의 함성을 술라가 종식시킬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야박하고 배타적인 토양 위에 분노가 뿌려지자 한니발이 그렇게도 열망했던 로마 동맹의 분열이 마침내 터져 나와 끈질긴 속성을 버리고 갈가리 찢겨져 나갔고, 로마는 혈맹을 맺었던 동맹시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36쪽, 「한니발 전쟁과 지중해 패권 시대」)
지휘관이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우수한 전투 장비, 정보 수집, 병사들의 충성심, 적절한 보급품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진영과 전투 장소를 유리한 곳에 선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파비우스가 지구전으로 한니발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진영과 전투 장소를 선정하는 데 탁월했으며 불리한 곳에서는 절대로 적과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50쪽, 「파비우스의 지구전과 미누키우스의 속전」)
시라쿠사 왕 히에로니무스는 어리석은 탐욕으로 시라쿠사 시민들을 정복자의 칼날 앞에 떨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했다. 이렇듯 현명하지 못한 지도자를 둔 시민들은 불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로마를 배반한 것은 로마를 미워하거나 증오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배반에 따른 처벌이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80쪽, 「한니발의 속셈과 시라쿠사 함락」)
카르타고는 제해권을 모두 잃어버렸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한니발을 지원한다는 것이 무모하기도 했으리라. 그렇더라도 훗날 닥친 카르타고의 비참한 멸망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한니발을 적극 지원하거나 한노의 주장대로 승리했을 때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84쪽,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결정」)
전쟁에서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한니발도 스키피오도 깊이 깨닫고 있었다. 다만 스키피오는 정보 수집을 위한 계략도 하나의 전술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달린 코앞의 잔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110쪽, 「스키피오의 정보 수집」)
사실 농지법은 350년 전부터 호민관들이 들고 나온 아주 오래된 민중의 소망이었고, 그 당시 호민관들은 징집 거부로 귀족들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모두 실패했던 지독한 쟁점이었다.
(215쪽,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실패」)
그가 “뜻을 이루려면 로마의 소수 몇몇 집단의 호의에 의존하기보다는 공식적인 로마의 동의와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리고 제위를 원한다면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충고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더라면 파멸을 면하고 영광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화합은 아무리 작은 것도 번창함을 가져오고 불화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막대한 분열과 파괴를 초래한다.”는 선왕 미킵사의 유언을 잊지 않았더라면 비참한 죽음을 면하고 자신의 행복과 국가의 부강을 도모할 수 있었으리라.
(262쪽, 「유구르타 전쟁과 마리우스의 개혁」)
자유를 얻고자 하는 노예들의 열망이 거대한 섬 시킬리아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자유민들까지 그들의 가난이 노예의 굴레와 같다고 여기며 반란의 깃발을 함께 들었지만 자신들의 봉기로 운명이 역전되기를 바랐던 그들은 가난과 노예의 굴레를 벗지 못하자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비록 노예 반란이 종국에 실패로 끝났을지라도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의 거친 함성이 아직도 들리는 역사의 숨결이 아닐 수 없다.
(269쪽, 「제2차 시킬리아 노예 반란」)
정치적 교양이란 상식을 경멸하는 데 필요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리비우스)
(280쪽, 「마리우스의 실패」)
로마 시민권을 개방하지 않고 독점적으로 가지겠다는 탐욕은 로마의 건국 이념인 개방과 포용 정책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로마의 시조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와 일대일로 겨룰 때, 유피테르 신과 마르스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면서 적과 싸워 이기더라도 패배한 적과 동등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즉, 동맹의 조건이 ‘동등’해야 시조의 이념과 들어맞았다.
(283쪽, 「호민관 드루수스와 동맹시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