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가지 않은 길을 꿋꿋이 가려는 초심을 끈지게 지니기란 힘든 노릇이다. 그렇다고 과분한 격려와 인정에 기대거나 우쭐거릴 틈도 없다. 되돌아갈 길도 없어졌고, 앞길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꾸 식견을 넓히며 품을 들이고 볼 일이다. 우리 시대 살아 있는 극음악(음악극)에 천착하다가, 땅 속 깊이에서 인접 학문과 다른 세계를 만나면 작업을 멈추고 그 광맥을 더듬으며 넋을 놓는다. 문득 석굴에 갇혀 버린 느낌이다. 곡을 만들고 공연을 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 있겠다. 나는 음악가가 아닌가! 그렇지!
일상에 고단하면 여행을 간다. 여행에 나서면 다양한 사투리와 외국어, 노래, 음조의 리듬과 억양에서 음절과 음형의 싹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세상의 소리에는 이야기가 있고, 또 이야기에는 노래가 있다. 이를 인지하고 교감하는 일은 음악가(작가)의 몫이다. 그런데 이야기와 노래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는 난관과 논란이 초래된다. ‘과연 이야기와 노래가 서로 유창하다는 논거가 명징한 것인가?’ 이 반문 앞에서 아득해진다. ‘귀납적 추론에 의하면 그렇다!’라고 답변해도 상대는 시큰둥하다. 그래서 서사학과 미학, 철학, 인지과학, 문화사회학, 문화인류학, 종족음악학과 같은 원군을 청한다.
(8쪽, 「여는 글」 중)
쿤데라는 소설에서 대위와 다성의 서사 기법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소설과 에세이를 혼합하고, 소설가의 존재인 화자를 소설 속에 낯설게 드러내며, 아이러니를 통해 키치의 세계를 풍자하고, 풍부한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소설사나 문화사의 문맥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시간의 흐름을 뒤바꾸고, 액자 소설을 집어넣으며, 매우 다양한 서사 기법을 구사한다.
쿤데라의 슬라브(보헤미아) 문화에 대한 정체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후진국’ 국민이 자문화(전통문화)를 ‘촌스럽다’고 인식하며 스스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근대적 주체 형성을 위한 성찰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말과 사투리, 노래(민요)의 리듬과 억양에서 문학의 싹이 될 음절이나 음형은 과연 무엇일까, 또 소설의 구성과 시점에 영향을 미칠 언어적(음악적) 형식과 지시(다이내믹과 아고기크)는 무엇일까, 그렇게 부단히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49쪽)
관객과 함께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토크 콘서트 형식의 공연 행위는 시공간의 몽타주를 구현하면서 “같고 다르고 또 같아” 완벽했던 우정을 공감각적으로 형상화시킨다. 이를 위해 사용된 다양한 연극적 수단들은 종속적인 상하(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병렬적인 좌우(수평)의 관계로 연결된다. 이렇게 병렬적으로 연출된 연극 수단들 사이에서 관객 역시 유사한 경험과 기억을 이입시킬 여지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관객이 모든 사건과 이야기를 이해의 차원이 아닌 감성의 차원에서 수용하도록 목표하였다. 서사 텍스트(대사와 노래, 영상, 디자인 등)와 관객의 교감에 의해 재구성될 최종의 서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여러 관점의 해석과 오해를 낳더라도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영원한 우정을 꿈꾸고, 지니고, 또 되새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