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연현상을 신화화(神話化)하고, 우주와 세상 만물이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서 의지적으로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인간의 지능(知能)이 고도로 발달한 이후의 일이다. 고대 인류는 자연이 그저 있는 것,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대에 지능이 깨어난 인간은 우주와 자연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인간 능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사유(思惟)를 갖게 되었으며, 자기 존재의 기원과 세상의 기원 등 도대체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43쪽, 「인간 지능의 진화와 신화 창조」 중)
가톨릭은 진화론(1859년)이 등장하기 이전에 창조에 대한 신학적 논리로 제시된 창조론 — 신은 인간을 정점으로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형의 물질에 형체를 부여하고, 생명체에 생명과 활동을 부여하였으며, 인간에게는 인간적 품위인 인격과 신적 본성 및 본질을 부여하였다는 설 — 을 현재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기원이 밝혀진 오늘날에는 무의미하며, 어떤 타당성도 가질 수 없다. 신에 의한 물리적인 우주 창조와 인간창조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125쪽, 「우주·인류의 기원에 대한 가톨릭의 주장」 중)
영혼이라는 개념은 영혼이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상상의 산물이며, 영혼이 현세의 기억과 감정과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영혼의 존재를 전제한 인간의 상상적 추론일 뿐이다. 그리고 설령 영혼이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을 관장하는 신이 꼭 야훼여야 할 이유 또한 없으며, 그가 야훼라는 타당한 근거도 없다.
(205쪽, 「영혼과 죽음과의 관련성」 중)
독실한 유대교 신앙인이며 유대교의 율사였던 바울은,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에 맞추어 가상의 인물인 예수를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사 42,1~9; 50,4~9; 53,4~10)의 내용에 부합되는 인물로 그려내어 그를 메시아로 세우는 복음서나 예수어록이라는 위작을 꾸며낸 뒤, 메시아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게 만들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각 지역에 예수 교회를 세웠으며, 후에는 바울의 창작 복음서나 예수어록을 바탕으로 복음서가 쓰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위작의 내용에 따라 종교 교의를 창출하여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만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지나친 억측일까? 설령 바울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여도 복음서가 위작임은 분명하다. 신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면서 해결점이 없는 문제들에 대한 사유의 답으로 설정한 가상의 산물이며, 야훼 또한 유대 종교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산물이고 실체가 없는 가상의 실재이므로, 인간의 상상 속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자가 인간의 몸을 취하여 강림(降臨)하였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238쪽, 「구약성서 속편으로서의 예수설화」 중)
미래의 지복만을 기다리는 불멸주의자들은 절대 ‘지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행복한 삶은 후회 없는 죽음을 맞는 것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것의 영원한 끝인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오늘, 그리고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죽음만이 우리의 모든 활동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선택은 다급하고 그래서 중요하다. 내일에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의 경험과 느낌과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보다 자기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며 각 분야에서 인류 모두의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 인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결국 죽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을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죽는다. 그래서 삶은 좋은 것이며 잘 살아야 한다.
(353-354쪽, 「에필로그—삶의 가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