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석공인 유모의 남편을 따라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의 형상이 바뀌는 과정을 즐겨 보곤 했다.
가난한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요즈음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그저 학업에 열중하여 집안을 일으킬 고급 관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아들이 미술에 눈을 뜨자 크게 분노하였다. 아버지는 기껏해야 장인으로 후원자들의 비위나 맞추며 살아갈 아들을 매질까지 해 가며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결국 미켈란젤로의 손을 이끌고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던 기를란다요의 공방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들이 훗날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들과 대등한 미술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22쪽)
세비야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618년 작 〈달걀 굽는 노파〉를 들 수 있다. 당시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문화 예술이 최고로 발달했다. 화가는 서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았고, 이 작품 역시 시장에서 달걀을 구워 파는 노파의 일상을 담았다. 카라바조의 영향으로 배경이 짙어 명암 대비가 느껴지고, 노파의 손 주름과 허름한 옷차림에서 자연주의적 사실주의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서민들은 고가의 달걀부침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는 곳은 여관 주방이다. 노파는 손님들의 식사를 담당했던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임을, 소년은 심부름꾼임을 나타낸다. 소년이 들고 있는 멜론은 십자가 형태의 끈으로 묶여 있는데, 끈 위에 왕권을 상징하는 표식이 달려 있어 달걀부침을 먹는 사람이 귀족임을 암시한다. (66-67쪽)
50세가 된 마네는 류머티즘을 앓는 도중 합병증까지 덮쳐 왼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51세에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난 후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그림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문전박대당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그들은 회화에 자유를 선사한 영웅으로 존경받기 시작했다. 마네도 재평가받았다. 〈올랭피아〉는 마네가 떠난 뒤 27년이 흐른 1907년, 루브르에 걸렸다.
마네의 모든 명화에는 복잡한 그의 사생활이 연관되어 있다. 마네의 첫사랑은 네덜란드 출신의 세 살 연상인 수잔 렌호프였다. 무언가를 혼자 깊이 간직한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누가 그 비밀을 알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몸짓과 입술을 하고 있었다. 렌호프는 마네의 아버지와 절친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루머도 있었다. (151쪽)
에뷔테른의 묘비에도 쓰여 있듯이 그녀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친 헌신적인 반려자였다. 모딜리아니는 380여 점의 유화와 30여 점의 조각 작품을 남겼다. 이제 그의 그림은 10프랑, 15프랑이 아닌 그 수백만 배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된다.
그림을 배우던 20살의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를 만나 진정으로 사랑한 대가로 감당해야 했던 궁핍은 너무나 컸다. 냉담하게 돌아선 부모, 생이별한 첫아기, 빈민촌의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은 더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알리고, 전시를 위해 화상들을 찾아다녔다. 이런 모습은 돈을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세상 속에서 숨 쉬기를 바라는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죽자 돈이 없어 그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에뷔테른은 할 수 없이 부모님을 찾아갔지만 차갑게 거절당했고, 결국 부모님의 건물 옥상에서 몸을 날린다. 임신 9개월인 채로.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