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들었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얀 피부, 커다란 눈, 계란형 얼굴, 완벽한 콧대, 거기에 환한 미소는 그녀의 미모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나를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그녀와 직접 마주친 순간, 그 누구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바보가 된 듯했다. 그냥 초라한 시종으로서 그녀를 숭배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온몸이 떨렸다.
(13쪽, 「애완견」)
현철과 병수에게 한턱 쏘는 자리에서 병수가 물었다.
“넌 어떻게 그걸 견뎠어? 나라면 불안해서 던졌을 거야.”
“아직 변동성이 안 끝났다고 믿은 것뿐이야.”
“변동성은 내 전공인데, 나를 제치고 돈을 벌다니. 그 변동성을 어떻게 확신한 거냐?” 현철이 끼어들었다. 사실 신희 때문에 버틴 것인데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세력의 마음 변동성을 읽으려 했고 내 마음의 변동성을 다스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마음에도 없는 말들이 술술 나왔다. 멀뚱해 있던 현철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주식이라는 도박이 이렇게 황홀하고 찌릿찌릿하네. 톡 쏘는 신희처럼 말이야.” 공연히 미안해서 숨겨둔 마음을 조금이나마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내 마음을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48쪽, 「변동성」)
일광 상태가 되면 나약한 정신을 통제할 수 있어 쉽게 유혹당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온까지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일광에 도달하려면 먼저 일공에 도달해야 한다. 일공이란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다. 처음 2개월 동안 달리기와 수영 등의 혹독한 육체 수련과, 그 후 2개월 동안 고된 정신 수양 후에야 일공에 도달했다.
비운 마음을 다시 응집시켜서 하나의 빛으로 바꾸었을 때가 일광인 상태이다. 공의 상태에서 마음의 안식은 있지만 강력한 예측력이나 물리적 파워 등이 나오지 않는다. 타오르는 불 속 거대한 기둥을 들어 깔린 아들을 구한 아버지는 일광의 상태에 도달해서 가능한 것이다.
다시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마음은 하나의 빛으로 화하더니 정신이 고요해지면서 에너지가 넘치고 사방이 훤히 보였다. 지켜보던 관장은 일광의 초입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때가 경기상사를 미수로 매수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일공에 들어가기 위하여 복잡한 정신을 비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보닛 위 신희의 원시림과, 갈대밭에서 착 달라붙은 미란의 나신이 교대로 정신을 지배한다. 갈수록 이들은 나를 뜨겁게 데우며 벌떡 세운다. 갑자기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걸 이기지 못하면 나는 다시 애완견이 될 거야.
비장한 각오는 일공을 불러 일으켰다. 신희와 미란은 나의 정신에서 순식간에 지워진다. 다시 마음을 하나로 응집시키자 머리는 고요해지며 경기상사 사건의 과거와 미래가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내가 6%를 매집하여 넘기는 것은 자금상이나 능력상으로도 불가능하다. L상사가 관심이 있다는 것은 다른 그룹도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작전꾼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주시중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다른 후보자들이 인수에 뛰어들도록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밖에 없다. 가능한 한 많은 후보 그룹을 방문해야겠다.
이들 말고도 변동성을 발생시킬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때처럼 다시 일인 작전을 해야 한다. 병수 팀이 무엇을 했더라. 사수 말로 그 팀에 언론 담당이 있었지. 나도 언론플레이를 해야겠구나.
(109쪽, 「위대한 개척자」)
그 후 주가는 여러 번 요동을 쳤다. 신희는 시키는 대로 90%를 팔았고 남은 10%를 가지고 있다고 연락해 왔다. 그 후 500%까지 올랐다. 그날 그녀는 10%를 다 정리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주식에서 목표가를 믿고서 끝까지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신희처럼 환상적으로 판 것은 투자의 귀재라는 나도 흉내를 못 내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간이 크다. 예쁘면서 이렇게 간이 커도 될까? 그녀의 나르시시즘의 극치에서 오는 공주병의 일종일까? 아무튼 그녀는 남들이 못 가지는 아가페적인 강력한 믿음 내지 자기도취가 엄청나게 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박을 터뜨렸다.
투자자금도 돌려주었고 2년간 직원 급여의 걱정도 사라졌다며 웃는 그녀는 대표이사가 아니라 걸쭉한 시장골목 아줌마 같다. 연거푸 소주 3잔을 마신 그녀는 말을 꺼냈다.
“머리가 좋은 네가 포커 잘 쳤다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고맙다.”
“니가 들은 결정적 정보 때문이지.”
“주식은 섹스처럼 이리 저리 마음을 찔러. 흥분의 도가니로 만드는가 하면, 하염없는 눈물도 주고 말이야.” 슬며시 그녀는 말의 방향을 바꾼다.
“시장과 종목, 인간심리의 변동성을 즐기는 게 주식이지.”
“넌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주식처럼 뭐든지 제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변동의 원천은 뭐라고 생각해?”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권태와 싫증이라는 감성 때문이 아닐까. 주역에서는 그걸 역이라고 하던데.”
“나는 인간 하부구조가 가지는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생각돼.”
(223쪽, 「세 여인의 변동성」)
파란만장한 변동성을 타고 다니는 나와 목표를 향한 악바리 속물인 인애는 유사한 면이 많다.
우리 둘에 비하면 자기의 생각이 흐르는 대로 거침없이 살아가는 신희.
우리는 성취지향적인 변동성을 사력을 다하여 아등바등 추구하고 있지만 신희는 자연 그대로의 변동성을 유유히 즐긴다. 우리는 저런 신의 길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이 넘사벽. 내가 모든 능력을 동원하더라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희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가 가진 천부적인 능력과 끝을 알 수 없는 나르시시즘의 환상적 조합일까?
“전자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지.”
자기의 불안과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자체가 그녀의 삶이며, 그런 투쟁적 삶이 풍기는 진한 향기에 우리가 마취되어 느끼는 열등감이 아닐까?
혹시 완벽한 공존적 감성, 천부적인 탤런트와 기품 있는 나르시시즘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그녀는 인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내가 그녀에게 가까이 가려 하는 것도, 내가 그녀 앞에서는 변변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400쪽, 「송충이」)
“절대적 사랑을 믿고 결혼한 대부분 사람의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적인 두근거림은 사라지죠. 이제 이성 하나를 곁에 확보했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긴장감이 없어지고 자기 관리도 포기함에 따라 이성적으로는 아무런 볼품이 없는 뚱뚱한 중년으로 전락하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수동적으로 얹혀 사는 동행, 즉 동반뿐입니다.
(...)
그 동반광도 상대방의 한풀이 감성을 모두 받아 주어야만 그나마 조금 얻을 뿐이죠. 그들이 원래 얻으려고 했던 절대적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양파 마지막 속 하나만 남은 겁니다. 사실 이 정도를 얻으려고 했다면 애초에 다른 방식을 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겨우 얻은 이것을 사회는 사랑이라고 칭송하고 그냥 살도록 은근히 강요하지요. 저는 사랑을 신앙 수준으로 승격시켜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환상 메커니즘은 처절한 실패작이라고 생각합니다.”
(485쪽, 「사랑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