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에서 산절로야생다원 일구기를 통해 진정한 다도(茶道)의 길을 가 보기로 했다. 다원이 이루어진 뒤에는 자연의 가르침을 정돈하고 다도를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선인들이 말한 도(道)의 모습을 좀 더 진하게 만나 보고자 했다. 이런 일은 내가 맨 처음으로 생각하거나 시작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차 3현(茶三賢)인 다산, 초의, 추사가 하셨던 일이다.
다산은 강진 다산(茶山)에서 직접 구증구포 및 삼증삼쇄라는 세계 제다사상 유례없는 독창적 제다를 하고 제자들로 하여금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여 신(信)과 성(誠)을 다도정신으로 삼는 심신수양다도를 실천하게 하였다. 또 초의는 『동다송』에서 ‘종다(種茶, 차 재배) - 채다(採茶, 찻잎 따기) - 제다(製茶, 차 만들기) - 팽다(烹茶, 차 우리기) - 끽다(喫茶, 차 마시기)’의 과정에서 정성을 다하는 게 다도’라고 역설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다도란 폼 나게 옷 입고 뻐기듯 차를 마시는 이른바 다례(茶禮)와 같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한 톨의 차 씨앗을 심는 일에서부터 한 모금의 차가 목구멍을 넘어가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온 정성을 다하며 자연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깨닫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왜 그럴까? 차가 지닌 자연의 이법(理法)을 종다에서 끽다까지의 과정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려 내 우리 몸과 마음의 병을 원인 치유해 주는 선약(仙藥)으로 전이시키기 위해서다. (10쪽)
야생차밭 탐사에서 확인한 바, 산에 심는 야생차는 동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 큰 혜택이자 장점이다. 차나무의 동해에는 적조 현상과 청조 현상이 있다. 청조는 땅이 얼어서 뿌리가 땅속의 수분을 흡수하지 못해 가지와 잎이 푸른 상태로 말라 죽는 것이고, 적조는 찬바람을 맞아 이파리들이 빨갛게 말라 죽는 것이다.
햇볕이 좋은 보성·화개·제주도 다원의 차나무들도 겨울을 난 3월 초엔 대부분 뻘겋게 동해를 입은 모습을 드러낸다. 산에 있는 야생차가 동해를 입지 않는 것은 잡목과 시든 잡초 더미가 바람을 막아 주고 이불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또 산에는 경사진 지형상 항상 땅속에 물기가 흐르고 있고 잡초와 잡목이 보온막 역할을 하여 땅이 얼지 않아 청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재배차단지에서는 동해를 막기 위해 쌀겨나 짚을 덮어 주고 곳곳에 선풍기를 달아 서리를 불어 내는 수고를 해야 한다. 아주머니들의 말을 듣고 나는 하루 일한 것으로 풀 뽑기를 그만두었다. 일당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더 일을 하자고 할 텐데 풀을 더 이상 뽑지 말자고 한 아주머니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129-130쪽)
그렇게 제다공방 이름을 짓고 간판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던 2013년 초가을 어느 날 밤, 나는 제다공방 안 평상에서 자던 중 새벽 서너 시 쫌 소변을 보러 밖에 나왔다가 아닌 밤중 머리 위에 벌어지는 ‘별 천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다른 세상 ‘별천지’가 아니라 정말 별들이 한판 세상을 여는 ‘별 천지’였다. (중략)
그날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한 별자리 이동이 바로 그 시각 산절로제다공방 머리 위에 오는 때였던 모양이다. 나는 그날 밤 어릴 적 보았던 ‘은하수와 별들의 환희’를 해후한 기쁨에 겨워 산절로제다공방 이름을 ‘은하수 아래’로 짓기로 했다. ‘호연제’는 부제로 하고.
은하수는 천도(天道)의 한 모습이기도 할 터이다. 우리가 차를 좋아하고 다도를 좇는 것은 차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하늘의 이치와 자연의 가르침을 깨달아서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자 함일 것이다. 마침 나는 올해 산절로제다공방 ‘은하수 아래’에서 첫 제다를 하면서 제다의 수준이 그 나름 자족할 만함을 느꼈다.
그동안 10여 년의 제다 수련을 거치며 솥의 화력과 찻잎을 솥에 넣는 횟수 등에 있어서 무리한 인위를 가하지 않고 생찻잎의 향을 최대한 살려 내는 제다법을 실천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섬진강 물줄기와 지리산에서 흘러내려 온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를 채우는 밤하늘의 현란한 은하수 ‘별 잔치’가 가져다주는 자연의 기운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367-3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