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은 신경질적이었다. 나른한 두뇌가 활동을 거부하고 뭔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기에도 어정쩡한 그 시간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9쪽
임 형사가 그들을 좀도둑으로 체포해 가지만 않았다면, 그들 덕분에 환은 무료한 오후를 제법 흥미진진하게 보냈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행위에 악의가 없었음에도 사람의 일에는 법이라는 것이 뒤따라 붙었다. -37쪽
마음은 언제나 성급했다. 그렇게 기섭은 결국 리밍과 한 집에 살게 되었다. 환장하리만치 좋았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 종일 실실거렸다. 그러나 딱 보름이었다. -60쪽
“아저씨 때문에 앞으로 커피는 못 마실 것 같네요.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범죄를 주문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에 빠져들 것 같단 말이죠.” -89쪽
조선시대에도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이들 중에는 살아 있는 유령의 벌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신분과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어느 누구와도 산 자와는 말을 섞을 수 없는 형벌. 살아 있는 사람들 틈에서 보여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외면당한 채로 사는 것이다. -149쪽
남자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건 화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고 싶었다. 화가의 욕망 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도대체 얼마가 적정선인지를 알 수 없었다. 팔겠다는 마음은 뒷전으로 밀리고 가격은 경쟁을 부추기듯 올라갔다. -216쪽
“그렇겠죠. 운이 좋은 아이니까, 난.”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환은 선호의 모습에서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선호는 그렇게 역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250쪽
같이 사는 여자한테 배반당한 그 심정이 오죽할까 싶어서. 남자의 야밤 테러는 오늘 따라 길고 끈적거렸다. 어둠을 틈타 터져 버린 남자의 상한 마음은 누군가에게는 몹시도 고약스러운 물건이었다. -253쪽
파란색 와이셔츠와 카디건 그리고 양복을 침대 위에 꺼내 놓은 상태였다. 양복이 좋을까, 바리스타 복장이 나을까를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였다면 길게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았을 터였다. -286쪽
범죄는 범죄일 뿐이다. 그 시작이 아무리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어도. 결과는 나비효과처럼 번진 다음이다. 범죄가 세상 밖으로 알려질 즈음이면 충격은 이미 준비된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거나 뒤집어 놓은 다음이기 쉬웠다. -303쪽
삶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죽음은 더 가까이에 있었다. 유년의 환에게 죽음은 또 다른 삶이나 다름없었다. 엄마 귀현이 베란다 창가에서 스르륵 사라지던 그 날, 삶과 죽음은 그렇게 하나로 뒤엉켰다. - 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