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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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혼에 지금 누군가가 장난을 걸고 있다. 아니, 내 몸으로 들어와 산 자들과 무언가를 소통하길 원한다. 이런 것을 두고 빙의라고 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영혼이 지금 내 영혼에 옮겨 붙기 위해 이런 수작을 걸고 있단 말인가.
이혼 수속에 필요한 법적 별거 기간인 1년을 채우는 동안 인선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혼자된 상황을 견디는 것이었다. 애초 시드니에서 가방 두 개 걸머쥐고 서울에 왔을 때부터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선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을 자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주말을 보냈다. 그렇게 혼자 1년을 지내고, 2년을 버티고, 3년을 살아냈다. 어느 모임에서 인선은 같은 또래의 독신녀를 만난 일이 있었다. 물론 초면이었다.
“댁은 말하자면 배냇병신이군요. 나는 살다가 병신 된 거고요.” “네?” “그러니까 댁은 결혼 않고 지금까지 주욱 혼자 살았으니 원래부터 팔이 하나 없는 상태로 산거나 마찬가지고, 나는 늘 두 팔로, 그것도 자그마치 25년간 생활하다가 갑자기 팔 하나를 잃은 느낌 이란 거죠.” - 본문 20쪽
자, 이러고도 내가 양처라고 할 수 있겠어? 칠거지악을 어기고 재혼하지 말라는 말을 했대서가 아니라 남편 내조라고는 거의 한 게 없었으니까 하는 소리야. 남편이 집에 붙어 있지를 않은데다, 나는 나대로 거의 20년 가까이 강릉에서 친정살이를 하느라 같이 살지를 않았던 거야. 남편은 한양에서 이미 다른 여자 치마폭에 휘감겨 있었거든. 친정아버지 돌아가신 후론 사위 노릇할 일도 없었고, 나중에 파주 살 때나 이따금 들렀으니 부부의 틈은 벌어질 대로 벌어졌는데 꼴 보기 싫은 건 당연한 거 아냐? 둘 사이가 어색 하지 않으면 얼음 같은 냉기가 도는 판에 무슨 내가 내조의 여왕이냐고? 바가지의 여왕이라면 모를까. 마땅히 하는 일도 없이 밖으로 빙빙 도는 남편을 살갑게 해 준 적도 없는 나 같은 여자에게 양처라는 말을 붙이는 건 좀 그렇잖아. 내 남편한테 물어봐. 자식 키우고 자기 일에는 열성이었지만 남편은 찬밥 취급했다고 할 걸. ‘양처는 무슨 얼어 죽을…….’이럴 거야. -본문 41쪽
남편과 아이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행복한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다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남편으로도, 아이들로도, 돈으로도, 건강으로도, 젊음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깊숙한 자아의 서랍, 혼자 발견하고 혼자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자아의 샘 같은 곳이었다. 환경이나 조건과는 무관하게 본래의 나를 만날 수 있는 통로 찾기 같은 것이었고 상황이 나쁠수록 자신을 버티게 하는 근원, 원천 같은 것이었다. - 본문 57쪽
남편과의 관계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만 탈선의 위기를 인선은 감지했고 남편은 그렇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 부부상담 등 전문가의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아보길 원했지만 인선이 절박하게 매달릴수록 남편은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세상에 완벽한 부부가 어딨냐고, 겉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속은 다 마찬가지라고, 당신만 좀 참아주면 우리 가정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로 갈등을 회피하곤 했다.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이혼을 생각하고, 이혼을 앞두고, 이혼을 마무리한 후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점검하느라 인선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사임당은 인선이 아들로부터 이혼 확정 통보를 받은 그 밤에 찾아왔다. 이혼은 관계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도대체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기에 그 관계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관계 맺기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 관계의 실패 앞에 인선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 머릿속을 헤집게 되는 것이었다. - 본문 76쪽
어린 아들 이원수는 일고여덟 살 때부터 빈 방에 홀로 방치되어 매일 저녁 떡을 팔고 엄마가 돌아오시기만 기다리는 외로운 소년으로 자랐던가 봐. 공부도, 예의범절도, 가정교육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거야. 의지박약에다 우유부단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고, 그러면서 늘 기가 죽어지냈지 싶어. 소극적이면서도 욕구불만을 안으로 감춘,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분노를 포장하고 눈치와 주눅으로 한평생을 살 위인. 하지만 그런 류의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바탕 심성은 나쁘지 않았어. 적절한 보호와 관심만 받았어도 그저 평범하고 무난하게 한세상 살 사람이었지. 하지만 단언컨대 그랬다 해도 나하고는 안 맞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 사람은 나하고 그릇의 질이 다르고 크기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 본문 95쪽
그렇게 남편은 이따금 집에 들러 내 배에 씨를 뿌리고는 또 훌쩍 떠났어. 남편이 공부를 아예 접었다는 건 첫 과거 응시 때 짐작을 했지만 무얼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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