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찍 다녀간 비는
허물어져 가는 벽에서 눈물로 흐르고
슬픔의 한이라도 서린 듯
오래 닫힌 방에는 한 줄기 빛이 관통한다
비라도 오지 않았다면
시류로 메말라 가는 순례자로서는
슬픈 역사를 찾기보다는
풍상의 흔적을 벽돌에서 찾으리라
전쟁의 상흔인가
본래가 피색인가
비에 젖은 벽체는 피처럼 붉어도
창문은 한 폭의 캔버스가 되었다
아이비가 감아 덮는 유적
그 사각의 벽 정점에
별같이 모여 핀 보라색 꽃 무리
메마른 가슴의 눈으로도 알아본다
혹여나 유적의 내력을 들을까
보라색 짙은 꽃향기라도 뿜어낼까
카메라를 들고 다가간 순례자에게
꽃은 슬픈 눈으로 웃는다
「유적에 핀 꽃」이다. 2018년 제20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 이 시를 보면 문인기의 시 창작법의 핵심을 읽게 된다. 바로 어루만짐이다. 컹컹 울어도 시원치 않을 구절구절을 억누르고 달래며 견디는 그의 감상적 눈물을 본다. 그리고 끝내 슬픈 눈으로 웃고 마는 그의 탁월한 절제력은 문학상 ‘대상’이라는 이름이 작아 보이기까지 하다. 심사위원 모두가 만장일치를 했으니 당연한 귀결이라고 기억된다. (169-171쪽)
호수를 찢으며 다가오는 날카로움
봄을 향한 큐피드의 화살처럼
나를 향한 회개의 촉구처럼
기실 계절도 가고 인생도 떠나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재회가 있으리라!
죽음 다음에야 부활이 있으리라!
「죽어야 사는 계절」의 한 대목이다. 물위로 돌연 보트 한 대가 정적을 깨고 전속 질주로 봄의 호수가 전쟁처럼 일순간 터지는 순간이다. 생은 이렇게 예측할 수 없이 고요가 비명이 되는 경우가 있다. … 삶은 지속적으로 경이롭다. 저 움이 처음 터 오르는 잎을 눈엽(嫩葉)이라 했던가. 저것이 신록이 되고 녹음이 되어 검푸르다 짙푸르다 각양각색의 표현을 달다가 드디어 단풍 들고 낙엽이 되어 낙하한다. 더 이상 나무에 줄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잎은 떨어져 나무의 겨울이 불이 되는 것이다. 떠난 다음에 재회가 있을까, 죽은 다음에 부활이 있을까. 그것은 저마다 주어진 소신의 역량으로 판단할 뿐…. 시는 적어도 재회와 부활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문 시인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173-174쪽)
함석지붕의 난타 연주에
처마 밑 낙숫물은 화음으로 화답하고
뒷산 숲에서는 바람의 노래
호수에는 새끼를 부르는 물오리의 외침
「소나기」의 한 대목이다.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여기서 펼쳐진다. 구름 위의 웃음이 여기 낙숫물 소리와 화합하여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낙숫물 소리, 뒷산 바람 소리, 물오리의 외침 외에 문 시인의 내면 소리의 외침도 섞여 있거나 이 모두가 문 시인의 소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 소나기의 힘으로, 그 소나기의 억센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은 탄생될 것이다. (177-178쪽)
혹독한 환경에서도 품은 꿈으로 평생을 순응했다
꿈으로 하늘 공간을 채우고 꿈대로 땅속을 뻗었다
수없이 닥친 고난을 견뎌 낸 체험을…
삶과 의지를 대극(對極)으로 놓고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살아온 어느 일생을 본다. 「어느 나무의 일생」의 한 부분을 보면서 여기 공간과 땅은 그의 꿈이다. 이 공간과 땅은 자신의 노동과 땀, 그리고 정신적 존엄성도 같은 공간에 있다. 그러므로 공간과 땅은 삶의 가치로 만들며 결국 그것을 꿈이 시키는 길이 아닐까. … 수없이 닥친 고난을 견뎌 낸 체험은 날개가 되어 시가 되어 꽃이 되어 이 세상을 울리는 오케스트라가 되어 지금 새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179-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