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유니버스의 시대는 끝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구나 AI와 같은 인력 대체의 도전에 대해 응전할 수 있는 보완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심화된 노동의 상실은 오랜 세월 동안 일(노동)이라는 아편에 중독되어 온 인간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마저도 잃어버리게 하는 정신적 대공황을 맞이할 것이다. 이미 영혼을 상실한 지 오래된 디지털 대중은 머지않아 일자리마저 빼앗긴 뒤 한때 고갱의 뇌리를 지배했던 ‘우리는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까?’와 같은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13쪽)
참을 수 없는 욕구(몸채우기)에 대한 억제나 지배와 같은 자학성(자발적 마음비우기)을 교의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종교와는 달리, 예술 활동은 욕구의 단념과는 반대로 참을 수 있는 욕망(마음채우기)일지라도 그것의 적극적 발산을 ‘영혼의 유희’로 승화시키는 대표적인 승화행위이다. 저자가 줄곧 지성이하의 감정승화물인 초인공지능의 물상적 시스템에 비해 지성이상의 욕망에서 비롯된 예술적 승화물인 고갱의 <집합체>(Summa)를 줄곧 강조하고 주목하도록, 즉 ‘고갱을 보라’고 요구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성의 부식이 심화되고 있던 고도의 기술문명 사회보다 원시에서 소크라테스의 주문대로 ‘영혼의 보살핌’을 추구하고자 했던 고갱의 욕망은 오늘날의 볼셰비키(빅 나인)가 선동하는 영혼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욕구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Summa〉에서 보듯이 그는 디오니소스적 정념을 ‘승화열’로 삼아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영혼의 자유로운 유희에 대한 감지를 환상적인 파노라마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03쪽)
고갱이 스마트한 첨단기술로 포장되고 있는 현장(표면), 다시 말해 영적 신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도시를 대신하여 새로운 신화가 될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속살(내부)을 찾아 나선 까닭과도 다르지 않다. 그는 그 원시의 땅이야말로 흔하지 않게 ‘지금, 여기에’(hic et nunc) 현전(現前)하는 환유공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욕망에서 영혼에로의’ 승화를 산출해 낼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순결한 파라다이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주문대로 당시의 소피스트들이나 다름없는 유럽의 물상주의자들에게 ‘나(고갱)를 보라’는 듯이 자신을 보살필 수 있는 영혼의 둥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118쪽)
특히 그는 샤머니즘과 같은 마오리족의 원시신앙을 비롯하여 원시적 삶의 양식이 그대로 투영된 그 캔버스들을 통해 반(反)자연으로서의 문화와 문명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반추하려 했다. 또한 그는 유일신에 의한 구원의 교의를 앞세우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모습, 또는 첨단의 기술문명으로 오염되지 않은 원시의 모습을 상상케 하는 〈옛날 옛적에〉, 그리고 달의 여신 히나(Hina)와 대지를 상징하는 남신 파투(Fatu)를 묘사한 〈히나 테파토우〉에서 보여 준 원시의 원상으로 자신이 유럽을 떠나온 까닭을 토로하고자 했다. (126쪽)
알파고의 사례에서 보듯이 의사소통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는 물론 사고의 지배권도 이미 컴퓨터에게 넘어가고 있다. 자연언어보다 막강한 ‘언어의 감옥’이 인간의 직관과 영혼을 그 안에 가둔 채 정신세계를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울타리(clôture)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기계적인 인공언어들이 인간의 생각을 체계적·수학적·과학적·논리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영혼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시대의 언어인 온기 없는 차갑고 냉정한 대수학적 코딩이나 과학적 컴퓨팅으로 영혼과의 어떠한 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세계에서 ‘닫힌 언어’는 더 이상 내면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영매가 될 수 없다. (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