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 설계의 핵심은 빛이다. 이제 빛은 천상의 신호가 되었다. 중세의 성당은 모두 신과 천사의 영성을 체험할 수 있는 ‘빛의 공간’으로 설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잔틴, 로마 네스크의 모자이크,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모두 신의 자취인 빛을 위해 설계된 양식이다. 물론 여기엔 철학과 건축술이 모두 영향을 미쳤다. 플로티노스(Plotinos)는 신플라톤주의자로 불릴 만큼 형이상학에 심취했다. 그에게 정신은 빛이고 물질은 어둠이자 덩어리였고, 세상 만물의 근원인 일자(一者)는 광휘로 빛을 발하며 존재하다 그 빛이 약해지면 어둠으로 들어가 사멸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빛이 생명과 존재의 징표였다.(39쪽)
미술에서 ‘추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회화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구체적인 사물의 이미지가 ‘구상’이라면 개념을 추출한 것이 ‘추상’이다. 인간이 인지하고 분류하는 모든 정신적 개 념이 추상인데, 이것은 다시 말해 인식(Cognition)을 말(word)로 전환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달리 추상화를 내건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논리적 개념으로 해설할 수 있어야 했다. 단단한 예술적 논리가 추상작품에는 필수가 된 것이다. 그림을 말로 설명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인류의 예술이 태고로 돌아갔다고 표현한 철학자가 있을 정도다.(93쪽)
조명, 세트, 구도, 색, 인물, 의상, 카메라 앵글 등이 시각적 부분이라면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의 결합, 내러티브, 이야기의 서사성 등도 영상미학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영상을 통해 특정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때 어떤 방식이 더 효과적인가를 다루는 학문이 영상미학이다. 기술적으로 분류한다면 5가지 기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는 빛과 컬러(Light, Color), 2차원적 공간(2-Dimensional Field), 3차원적 공간(3-Dimensional Field), 시간과 동작(Time, Motion), 음향(Sound)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룰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영상으로 만든 것이 바로 프레임(Frame), 숏(Shot), 컷(Cut), 신(Scene), 시퀀스(Sequence)와 같은 기초단위다. 하지만 영상미학은 더 깊고 복잡한 영역까지 다룬다. 미학적인 요소들이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다루며 어떻게 메시지를 소구하는지 다룬다. 영상은 인류가 창조했던 수없 이 많은 미학적 요소가 필요하다.(120쪽~121쪽)
가장 큰 변화는 예술 수용의 주체성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해 회화와 사진은 아직도 이를 해석하는 주체의 인식이 중요하다. 이미지에 대한 수용과 반응은 일생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기에 관객의 능동적 참여와 해석이 중요했다. 특히 사진만 하더라도 아무리 환상적 장면을 연출해도 결국은 수용자들의 이미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리산 자락을 가득 메운 운해와 봉우리를 바다 위의 섬으로 표현한 사진도 결국은 관객의 적극적 해석이 있어야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디지털은 그렇지 않다. 영상의 픽셀은 처음부터 환상을 창조하고 보여준다. 서사의 영역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미지의 영역에선 심층적인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픽셀의 세계에선 영상에 압도되어 따라가면 그만이다.(164쪽)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철학적 토대에 기반한 독창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영화인이라면 흥행엔 실패할 순 있어도 망작은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흥행에 참패한 영화는 사조의 변화에 따라 다시 역주행의 신화를 그려내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토대란 철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영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이 고민해야 하거나 고민할 수 있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183쪽~184쪽)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그린 계급투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실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선전되었던 설국열차가 사실은 부품이 하나둘 망가지고 있고 꼬리칸의 아이들의 희생이 없으면 더는 유지되기 불가능한, 몰락이 뻔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상징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를 구했던 길리엄이 사실은 열차의 설계자 윌포드와 한통속이었다는 점 이 반전이다. 열차의 인구가 일정한 개체 수를 넘어서면 인위적으로 혁명을 조장해 살상을 통해 인구를 조절하는 시스템의 복무자였다는 것이 충격이다. 감독은 직선적 역사관에 기초한 계 급투쟁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의 세력이 열차를 장악해 열차 안에 새로운 평등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으로 끝나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열차는 불완전하고 언젠간 멈출 것이 분명하기에 열차 내에서의 계급투쟁은 살아남은 인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221쪽~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