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곧바로 콜라 두 잔을 가져왔다.
“이름이 뭐예요?”
“예? 이름요? 김승호입니다.”
“호호호, 흔한 김씨군요.”
어찌된 노릇인지 상철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김승호”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쪽은요? 애니라고 부르던데.”
“호호호, 애니는 별칭이에요. 본명은 최연희(崔姸熙)입니다. 여기 오니까 본명을 안 부르고 별명을 부른다고 하면서 막내나 꼬마라고 부른다고 하기에 내가 싫다고 했어요. 애니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그때부터 애니가 되었네요.”
“그렇군요. 애니라면 꼭 만화 여주인공 같네요.”
“맞아요. 순정만화 여주인공 이름예요. 불쌍한 애니가 온갖 고생을 하다가 나중에 백마 탄 왕자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예요. 그리고 애 자가 사랑 ‘애(愛)’ 자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37-38쪽, 「하룻밤 풋사랑」)
그렇게 둘은 맥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상철이가 먼저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나오고 이어서 애니가 들어갔다 나왔다. 상철은 가운을 걸친 채 죄인 아닌 죄인처럼 침대에 엉거주춤 걸터앉아 있었다. 애니는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마자 방긋 웃어 보인다.
“여자 몸 못 봤지?”
“응, 못 보았어.”
“호호호, 그럴 줄 알았어, 총각이라니 당연하지.”
“왕(술탄)이 해결 못하는 거 누나가 해결해 줄 수 있지.”
이러면서 애니는 가운을 새 날개처럼 옆으로 벌리었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배꼽 아래의 둔덕, 그야말로 헤어 누드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허억~”
상철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무의식중에 벌떡 일어나서 애니를 끌어안으려 했다.
“안 돼~”
애니는 다시 가운을 여미었다.
(92-93쪽, 「하룻밤 풋사랑」)
의과대에 입학하여 봄이 되었다. 상철은 문득 애니가 생각나서 아직도 그곳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아리동으로 갔다. 이게 얼마만인가? 군 생활 2년, 입시공부 1년하고 지금 봄이니까 대략 3년 3개월만이다. 무엇인가 한번 시작하면 외골수로 매진하는 성격이었던 상철은 의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심신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상철은 설레는 가슴으로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러나 언덕길에 있었던 달무리 다방은 이제 막 철거하고 있어서 이층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일층은 반 정도 철거되었다.
중장비가 와서 그 주변 건물을 철거하고 있었다. 상철은 매우 실망이 컸으나 용기를 내어서 작업하는 인부에게 여기 있던 다방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무도 몰랐다. 상철은 그대로 서서 물끄러미 사라져가는 건물들을 쳐다보다가 상심한 채 터덜터덜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114-115쪽, 「예상치 못한 진로 변경」)
청년은 아직도 앉지도 못하고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다.
“젊은이, 어려워 말고 앉게나, 우연히 지나다가 나랑 너무 닮아서 한번 불러보았으니 어려워 말고 앉아.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나 해보세.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나.”
“예. 사장님.”
“이름이 뭔가?”
“최두호입니다.”
최두호라면 자기의 이름은 현상철하고는 아주 무관하다. 상철은 순간적으로 우연히 닮은꼴 청년을 만났네 하고 생각했다.
“사장님, 먼저 소주 한잔 할 수 있을까요?”
그 젊은이도 혼란에 빠져 속이 타들어가기에 먼저 술 한잔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어~ 그러게.”
상철은 호출벨을 눌러서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먼저 가져오라고 했더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가씨가 곧바로 소주 한 병과 부침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예의상 그 청년이 상철에게 소주 한 잔을 따랐고 상철도 그 청년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서 그냥 별말 없이 각자 마시었다. 왠지 분위기가 매우 어색하게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은 소주 한 잔을 자작으로 더 마셨다. 그러곤 침을 한번 꿀꺽 소리가 나도록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사실은 제가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나서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뭐어? 그래도 어머니는 아실 것 아닌가, 아주 뜨내기로 만났거나 겁탈을 당하기 전에는 어떤 남자와 교제를 했는지 알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어떤 대학생을 알게 되어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때 저를 임신했다고 하셨어요.”
이 말에 상철은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76-177쪽, 「주차 유도원」)
두호는 계단을 내려가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는 상철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서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한밤중처럼 캄캄했고 퀴퀴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홍미나는 즉시 손으로 코를 막고 들어섰다.
두호는 거실 불을 켰다. 오래되고 초라한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두호는 안방문을 열고는 “엄마, 사장님 오셨어.” 하면서 형광등을 켰다. 그 순간 상철은 엄청난 궁금증과 호기심에 소파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안방으로 다가갔다.
불을 켜자마자 어느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는데 한눈에 보아도 애니였다.
“아~ 애니야!”
상철은 펄쩍 뛰어서 애니에게 다가갔고 애니 역시 한눈에 알아보고는 “술탄씨~”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였다. 상철과 애니는 네오디늄 자석이 들러붙듯이 서로 껴안고 눈물을 마구 쏟기 시작했다. 이게 얼마만인가? 2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놀라운 광경에 홍미나는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솟구치는 측은지심에 숙연해지면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두호 역시 옆에 서서 말없이 눈물만을 닦아낼 뿐이었다.
(199-200쪽, 「24년 만의 해후(邂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