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끼 먹는 밥이 단지 생명 부지하기 위한 것인가 싶은 마음이 들 때, 식탁 위 마주 앉은 나를 그리워하며 꾸역꾸역 밥을 집어넣었을 엄마의 마음을 난 왜 더 일찍,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엄마가 있을 때 엄마를 너무 외롭게 했다. 혼자서 밥을 잘 먹는 거랑은 아주 다른 문제인데 무슨 근거로 엄마가 외로움을 잘 안 타는 사람이라 단정 지었던 걸까. <86p ‘혼밥을 잘하는 건 아는데’>
나는 단 한 번도 그 차가운 산골짝에 우리 엄마를 둔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퇴근길 마주친 뻥튀기 트럭에 있고, 주방에서 매일 쓰는 앞치마에도 있고, 안방에 있는 엄마 옷과 가방에도 있으며, 닫힌 방문을 열고 지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이 집 안 곳곳에 가득하게 있다. 만난다고 어디론가 갈 필요가 전혀 없고, 반대로 어디로 간다고 만나지는 것도 결코 아닌데, 사람들은 참 뭐를 잘 몰라. <105P ‘사모님은 홍천에 계실지 몰라도 우리 엄마는 아니에요’>
그렇게 나는 내 생일을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었다. 매년 겨울의 초입에 돌아오는 내 생일에는 설레거나 기쁘기보다는 그저 엄마 생각을 많이 한다. 꼭 나를 낳았던 엄마의 수고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또 내 중심의 생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엄마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한다. 엄마가 태어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다. <126p ‘엄마는 자식에게 두 번의 생일을 준다’>
아빠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꿈에서 우리 엄마를 봤노라고 말할 때마다 그랬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긴 했지만 정작 자기 딸내미 꿈속에는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날 밤 불시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할 말을 준비해야지 하고 생각날 때마다 노트에 메모해 두기도 했다. <154p ‘기다리지 좀 마 내가 언제 갈 줄 알고’>
슬픔이 곧 애도이자 떠난 사람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때는 계속 슬프지 못해 죄스러웠다. 적어도 엄마의 기일에는 조금은 우울하게, 또는 외롭게,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잡고 다른 날과는 다르게 지내는 것이 엄마를 기억하는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234p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마다 떠오르는 슬픔이면 충분해’>
무언가 잘못되었다 해도 그게 반드시 연쇄적으로 나쁜 일을 가져오는 게 아니고, 사라지는 물건에 엄마의 존재를 대입시키지 말라고, 그런 식으로 애써서 연결된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288p ‘망가지고 부서지고 엉망이 되어 버린 것들이 주는 메시지’>
모두가 울지 말라고 할 때, 오히려 외로움과 슬픔을 느낄 때마다 함께 계실 테니 울음을 그치지 말라고 하는 너의 그 위로가 좋다. 참 진실된 너의 말이기 때문에 힘이 된다. <347p ‘너희 어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겠어’>
엄마를 보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상실을 겪었다. 단지 멀어진 이도, 이 땅에선 다시 볼 수 없게 된 이도 있었고, 서서히 잃기도, 갑작스럽게 잃기도 했다. 황망할 때도 있었지만 무덤덤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상실의 때마다 나는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난 후 읽으면 언제나 성장한 내가 과거의 내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경험을 했다. 때로는 써 내려가는 그 행위 자체로 위로받기도 했다. <348p ‘우리는 결국 다 잃어버릴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