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란 어그러지거나 깨지지 않도록 그릇의 몸을 둘러맨 줄이다. 성한 그릇보다는 금이 갔거나 벌어질 조짐이 있을 때 두르는 것 아닌가. 옛날에 쓰던 장독을 살펴보니 모두 철사를 꼬아 매어 놓았다. 한솥밥을 먹는 가족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온갖 먹을거리를 보관하는 크고 작은 옹기에 아버님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내 집에 들어온 물건이라 오래 함께하고 싶었던 오롯한 마음이 묻어났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테는 철사 두 가닥으로 표현한 아버님의 웅숭깊은 배려였다. (18쪽)
얼른 한 그릇 떠서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갓김치 한 보시기 곁에 두고 뜨거운 국물을 한 술 떠넘긴다. 깊은 맛이 입안에서 혀를 타고 올라온다. 장어의 구수함과 갖은 채소의 들척지근함이 어우러진 맛이다. 그 단맛은 한 가지에서 나는 진한 맛이 아니다. 조금씩 양보하고 조심스럽게 어울려 입맛을 돋우는 순한 맛이다. 숟가락이 넘치도록 야채 건더기를 올려 입속에 몰아넣으니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이 순하게 열린다. 등에서 땀이 난다. 허리가 쭉 펴진다.
“그래, 내 손이 내 딸이지.”
은연중에 뱉은 말이다. 음식 솜씨, 맵시, 마음씨가 곱다고 소문난 손끝이 야물던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순간 명치가 묵직하다. 그 묵직함이 나를 학창 시절로 이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가슴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다. (49쪽)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아들이고 어머니는 궁둥이를 밭고랑에 끌고 다니며 일을 하는데 아들은 집안일을 잘하고 노인은 바깥일을 잘한단다.
“해마다 고구마 순을 심으며 내가 죽으면 거둘 사람 없는 울 아들과 오래오래 살다가 같은 날 한시에 묻히게 해 달라고 빌어.”
그렇구나.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그 염원이 노인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구나. 노인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갈 길을 간다. 어느새 골짜기에 있던 이내가 마을을 거쳐 강까지 내려왔다. 영천강 보 위에서 먹이 사냥을 위해 꼼짝 않고 가는 다리로 버티고 있는 왜가리. 깡마른 노인의 모습인지 왜가리인지 흐릿하다. (71쪽)
“뿌리라고 하면 땅속으로 뻗어 내리는 것인데 더웠다가 춥다가 건조하기도 한 땅 위로 올라올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지만 저렇게 땅 위로 올라와 숨을 쉰답니다. … 누구든지 시련에 부딪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어려운 처지가 영원하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힘이 모자란다면 부모, 형제, 친구, 이웃의 손을 잡으세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낙우송을 두 팔로 마음껏 안는다. … 이내 모두 얼굴을 들고 푸름이 묻은 물방울 샤워를 한다. 활짝 핀 부용만큼이나 표정이 환하다. 한 학생이 “쉿” 입술에 대었던 손가락으로 옆의 나무를 가리킨다. 젖은 수피에 붙어 있던 매미가 허물을 벗고 있다. 사람들은 출산을 돕는 의사의 마음처럼 서로 잡은 손에 힘을 준다. … 날개를 말려 줄 바람이 건들 분다. 모두의 입김을 모은 바람이다. (150쪽)
억지로 피우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으면서도 때가 되면 피운다. 피어난 꽃은 바닥을 기는 땅빈대도, 하늘을 능가한다는 능소화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산다. 꽃무릇도 준비하고 있을 거다. 누가 뭐라고 하든,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 되어 꽃의 길로만 간다. 갈팡질팡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 꽃으로만 산다. 태양을 향해 피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꽃은 지고 진자리에 열매 맺는다. 상사화가 피면 마음은 따라 애절하고 그 마음 다독이느라 백양꽃이 노을처럼 곱게 번진다. 질세라 뒤이어 꽃무릇이 핀다.
여린 꽃은 저리 오롯한데 바라보는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흔들린다. 좁은 화단에 꽃은 성긴 듯 무성하다.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