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다. 해마다 6월이면 새소리가 유난하다. 산란철엔 짝짓기로 요란하고, 지금은 둥지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 영역 싸움을 한다. 뻐꾸기가 울고 어치의 활공이 어지럽다. 얼마 전 배추 모종 20포기를 사다 심었는데 아직 시들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매일 물을 주고 있지만 내 밭 주변엔 온통 싱싱한 푸른빛 배추밭이라 더 비교된다.
바빠서 물을 못 준 날엔 달이 훤한 밤에 난실로 나가 난에 물을 준다. 이번 가을 달밤엔 아내와 마주 앉아 배추전에 막걸리를 기울이고 싶다. 이것도 행복이다. (21쪽)
어릴 적 아버지와 동네 어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무엇인지 모를 경외심의 정체는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들판을 내달리며 뛰어놀다가도 지붕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보이면 집 마당을 향해 달음질쳤고 부뚜막의 밥 냄새에 안도하곤 했다. 그 추억이 가능했던 것은 뙤약볕 들판에서 종일 허리 숙인 그분들이 있어서였다. 아마 우리 세대가 노동하는 아버지의 형상을 선명하게 각인한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38쪽)
관계의 종말은 대부분 ‘실망’에서 비롯된다. 실망감은 기대감의 저편에 있다. 우리가 사람에게 느낀 대부분의 독특함과 매력은 흥분된 기대감을 주고, 세월이 흘러 이를 갉아먹는 모습을 보며 우린 실망한다. 오랜 벗에게도 서운함을 반복적으로 느끼면 실망하고 관계를 닫아 버리곤 한다. 그리고 이 실망의 늪을 반복적으로 오가면서도 서로가 있어야 삶이 든든하다고 느낀 이들만이 진정한 평생의 벗을 얻는다. 백발이 될 때까지 친구로 남은 이들은 “인간에 대한 실망 따위는 당연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만 그 친구가 있었을 때 삶의 에너지와 존재감을 얻었기에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87쪽)
내 고향 문경은 겨울엔 눈이 많이 왔고 바람이 매서웠다. 약 20년 전에 거제의 동백나무 한 그루를 구해 고향집 화단에 옮겨 심었다. 봄에 심어 가을까지는 잘 커 주었으나 겨울이 되자 꽃망울까지 얼어 검은색을 띠며 시들했다. 나는 혹한에 시달린 나무가 곧 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를 난 동백은 해를 거듭하며 변화에 적응해 갔다. 그리고 지금은 풍진세상 자수성가한 가장의 모습으로 늠름하게 뿌리를 내리고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다. 동백은 이른 봄에 꽃을 피워 몇 개월간 가족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거제의 따뜻한 겨울에서 크던 동백이 문경의 겨울을 이겨 낸 것을 보고 뿌듯하기도 하고, 참 잘 심었다고 생각했다. (102쪽)
특별하지 않지만 내가 행복을 얻는 통로는 몸에 있을 것이다. 왜냐면 동일한 조건과 상황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이가 있고, 불행한 상상에 빠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질료는 세상 천지에 널렸지만 행복감을 느끼는 감각은 오직 자신만이 개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작품을 읽거나 좋은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세상 누구보다 좋은 ‘행복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걷고 읽고 경청하는 것. 여기에 더해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나씩 실현하는 것이 내 행복의 원천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좋은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돈이 없어도 가능한 나만의 안식이다.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