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늘그막에 철들어 부모에게 효도하려 하지만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한시로 표현한 위의 문장이 가슴팍을 절절히 후려친다. 나는 이담에 늙어 수족이 불편해 지면 집에서 기거하다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자식들이 내버려 둘까. 사 방에 기계음으로 장벽을 쌓고 신음하다가 객사客死하는 순간을 맞을 시간을 생각하면 집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행복으로 삼았던 옛 어른들의 생각이 옳았다. (26쪽)
내 인생 시계는 고장도 없건만 내 의식의 뒤뜰은 마냥 허허로운 기운이 감도는 요즘이다. 더욱 보듬지 못했고 섭섭하게 했던 일들을 시적거림 없이 찾아내고, 찾아가 용서를 빌면 받아 줄까. 아니, 찾아오는 것 자체를 부담으로 알면 어쩌나…. 내 마음 밭에 버티고 있는 어두운 흔적, 삶이 남긴 찌꺼기, 버리지 못해 미련으로 얼룩진 자국마저 차라리 내 안의 싱크홀에 가두자. 싱크홀은 지나간 흔적을 되돌릴 수 없다.
죽은 듯, 없는 듯 사는 게 용서를 비는 일이 아닐까. 올해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차라리 ‘덕족이회원德足以懷遠’ 문구를 손부채에 써서 보낼 준비나 해야겠다. 작은 일이지만 용서를 담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52쪽)
세계 선진국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농촌을 버린 나라는 없다. 최소한의 먹거리는 자급을 하지 않으면 국민의 생명을 외세에 맡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자연과 멀어질수록 건강이 좋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코로나를 마주하면서 농산어촌의 자연환경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농촌의 노령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농촌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기에 농촌은 안성맞춤이다. 흙을 밟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병원에 가는 횟수가 적음은 이미 통계가 말해 주고 있다. 흙과 더불어 자연을 벗 삼으면 치유의 공간이 되고 인간 삶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 ‘도시와 농촌의 균형 발전’은 위정자의 구호가 아니라 온 국민의 의식 속에서 싹이 터야 한다. 서울에 살고 있는 세 자녀들에게 늘 강조하면서 농촌을 지킨다. (142쪽)
빛과 소금은 생명 유지에 절대적 존재이고 우리 인간이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자연과 신에게 진 빚을 갚아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이르는 말이다. 작은 우주에 잠시 다녀가는 미물이 지구를 더럽히고 가서야 되겠나…. 오늘도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