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에게 대항하는 부장과 함께 출전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부장을 자신의 심복으로 둘 수 없었던 플라쿠스는 로마를 떠날 때부터 실패의 씨앗을 가지고 출항한 결과 자신의 죽음을 재촉했다.
(75쪽)
정복자의 노리개가 되지 않도록 자결할 것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남편이나 오라비가 강요할 일이 아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수많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결정한 미담이기 때문이다.
(127쪽)
세월의 무게는 변화를 강요한다는 섭리에 따라 가축이나 기계처럼 취급되던 노예의 처우가 점차 인간적으로 개선되었다. 고대 국가로서는 유동성과 개방성이 탁월했던 로마의 신분 체제는 마침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황가의 해방 노예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158쪽)
인간 세계의 부조리는 제안 내용보다는 제안자의 힘에 따라 결정되는 데 있다. 셈프로니우스 법을 주장한 클로디우스는 매우 정당했지만, 만약 그가 집정관 카이사르의 지지를 받는 호민관이 아니었다면 정의의 목소리는 허공 속에 사라졌으리라.
(207쪽)
관용을 베풀고 민중의 권리를 중시하던 카이사르도 상대가 로마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관용이 작동되지 않았다. 특히 갈리아 전쟁에서 그는 자신의 특징인 관용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자비를 구했던 베네트족의 원로원 의원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에브론족을 전멸시키려 했다.
(260쪽)
다윗과 치열하게 싸우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부하인 바아나와 레갑에게 암살당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넷의 머리를 잘라 다윗에게 가져와서는 칭찬과 보상을 바랐지만 그들은 수족이 잘리고 처형됨으로써 죄과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렀다. 다윗은 주군을 배반한 행위를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행위”로 규정짓고 이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311쪽)
독재의 기미는 마리우스가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술라가 체제를 열었다. 그 이후 카이사르는 이미 열린 문과 닦인 도로에 팻말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가 보수 공사를 완료하여 그 팻말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344쪽)
14세기 동로마 황제 칸타쿠제누스는 말했다. “적국과의 전쟁은 여름이 내뿜는 더위와 같아서 언제든 참을 만하며 대개 유익하다. 하지만 내전은 열병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열기와 같아서 마땅한 치료약도 없으며 나라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또한 호메로스는 “내전을 좋아하는 자는 친족도 없고 법도 무시하며 가정도 없는 자다.”고 갈파했다. 하지만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는 물론이거니와 옥타비아누스까지도 내전의 승리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내전의 승리자가 적국과의 승리자보다 더욱 달콤한 승리감을 맛보는 만큼 내전에서 패배한 자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장군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385쪽)
안토니우스의 또 다른 실책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에 경험 없는 여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진실이야 어쨌든 그는 도망칠 준비만 하고 있던 여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전쟁터를 내팽개침으로써 패전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콧대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은 악티움 해전의 참전을 고집했던 그녀를 빗대어 한 말로서 매우 적절했다.
(432쪽)
헤롯 왕이 살아남기 위해 충성 대상을 수시로 바꾸어도 성공했던 이유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깨닫게 했기 때문이며, 아울러 자신의 충성을 받게 되는 자 또한 그 가치를 이해할 정도로 현명했기 때문이다.
(4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