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는 해방구였다
영남알프스는 마을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봄이면 반달비, 곤달비, 참나물, 더덕, 고사리를, 가을엔 머루, 다래, 싸리버섯, 송이버섯을 따 언양장과 신평장에 내다 팔았다. 여름이면 소를 방목했고, 비탈은 녹비(綠肥, 푸른 거름) 예초(刈草, 풀을 베는)장이었다. 겨울이면 땔감을 하고 각종 농기구의 원산지였다. 마을의 보고이자, 젖줄이 영남알프스이다.
하지만 영남알프스는 소도의 산이었다. 봉건왕조 때도, 일제강점 때에도, 해방 전후의 시기에도 권력자는 없었다. 생존의 산이었다. 정치적 억압이나 종교적 억압을 피해서 민중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곳에서 만들었다. 임진왜란 땐 ‘호국’의 산, 일제 강점기에는 ‘분노’의 산, 한국전쟁 때는 ‘저항’의 산이었다.
(129쪽, 「빨치산 남도부, 신불산에 오다」)
반구대를 가본 사람은 안다. 특히 비온날 가보면 더욱 이곳에 왜 많은 시인들이 왔는지를. … 산의 뼈대가 거북으로 변한 반구대 골짜기에 불어난 물이 미친 듯이 큰 바위 작은 돌을 휘돌아 흐르다가 반구대 골짜기에 부딪혀 우레 같은 소리를 내고, 깊은 소를 이룬 곳에는 공룡이 웅크리고 있는 듯하고, 비래봉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마치 신선이 노는 풍경을 연출하고, 기이하게 깎인 바위 절벽은 하늘에 닿고, 천년 묵은 거북이는 목을 길게 빼고 목을 축인다. 휘영청 달이 구름 사이로 비추면 반구대 각석에 새겨진 한 쌍의 학이 층층 바위 위로 가벼이 날아오른다.
(285쪽, 「포은 정몽주의 길을 더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