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지명이나 인명 대부분이 한자이고 단어의 어원 중 한자어의 비중이 매우 크다. 베트남의 역대 왕조의 성씨인 응오(吳), 딘(丁), 레(黎), 리(李), 쩐(陳), 호(胡), 찐(鄭), 응웬(阮) 등이 모두 한자이고 임금들의 묘호 역시 태종, 성종, 인종 등 중국식으로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때와 똑같은 묘호가 많다. 현대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은 ‘胡志明’의 베트남어 발음이며 일반 백성들의 성과 이름도 대부분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수도 하노이는 河內(‘하천, 즉 강의 안쪽’이라는 뜻)의 베트남어 발음이다. 하노이는 홍강(紅江)의 안쪽, 즉 내륙 쪽에 위치하고 있다.
17쪽, 「대표적인 한자 문명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중국에서 베트남 사신과 만나 한문으로 필담하고 한시를 주고받은 기록이 있고 현대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은 뜻밖에도 조선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하였다고 하는데 한문세대인 호치민은 당시에 『목민심서』의 한문본을 읽은 것이다.
21~22쪽, 「대표적인 한자 문명권」
17세기에 베트남에 갔던 이탈리아 선교사 크리스토퍼 보리 신부는 시골 서당에서 소리 높여 중국 고전을 외우는 학생들의 모습을 매우 인상 깊었던 광경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의 서당과 똑같은 모습이다. 그 후 응우옌(阮)씨 왕조 초부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1858년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출신 선교사 25명과 베트남인 성직자 300여 명을 비롯한 2만 명이 넘는 신자가 처형되었다.
30쪽, 「종교와 사상」
고려 때 금나라의 압박에 굴복하여 군신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쟁을 피한 적이 있는데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자발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택한 결과 전쟁을 피하고 독립을 지켰다.
반면에 베트남에서는 쩐(陳)씨 왕조(1225년~1400년)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한 호뀌리(胡季犛)가 명나라에 대항하다가 명나라 영락제가 보낸 대군의 침입으로 멸망하여(1406년) 베트남은 명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호뀌리(胡季犛)와 아들 호한뜨엉(胡漢蒼)은 명나라에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76쪽, 「명나라에 대한 한국과 베트남의 다른 선택」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의 고통스런 역사’)』는 베트남의 애국지사 판보이쩌우(潘佩珠)가 구술한 『월남망국사』처럼 한국이 나라를 빼앗기게 된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매국노와 애국자 명단을 수록한 학술서이다.
178쪽,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치고 일본에 당한 한국」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에 의하여 베트남은 북위 17°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끝나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에 베트남도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다.
213쪽, 「한국의 남북 분단과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