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복을 입고 관모와 관대를 두른 봉림대군이 진심 어린 눈으로 이무진을 쳐다보았다.
“예, 대군 마마. 저는 오직 대군 마마 편이옵니다.”
말끝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일어서는 이무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봉림대군의 입가로 가득 미소가 번졌고 이무진의 입가에도 웃음이 배었다.
동인, 서인이라 하는 패거리 정치싸움으로 나라가 화를 당한 것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당의 이익은 절대 놓을 수 없느니라 사심을 부리다 나라와 백성들을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임진왜란이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고, 정묘호란 때 전주로 피난가다 눈밭에서 얼어 죽을 뻔했던 일도 바로 십 년 전 일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진저리가 쳐진다.
전쟁은 백성을 곤궁으로 몰아넣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다.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한다.
(13쪽, 「전쟁」)
“지금 이 나라에는 이렇다 할 나라정신이 없어 중국의 간섭을 받고 있지만 우리가 우리 정신만 찾았다 하면 그때는 사정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 진사가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끔벅대었다.
“정신이 나가면 사람도 식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에도 나라정신이 있는데 그 정신이 빠져 버리면 그 나라는 강대국의 노리개가 될 뿐이에요.”
“…….”
“고려 때는 불교가, 지금은 주자(朱子)의 정신이 이 나라 조선을 지배하고 있질 않습니까?”
한 진사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이유는 배달의 근본정신인 경천(敬天), 숭조(崇祖), 애인(愛人)의 사상이 백성 개개인의 머릿골 속에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조상을 알고 하늘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나라는 망할 수가 없어요. 이제 곧 그런 날이 올 것이나……”
한 진사가 두 눈을 치뜨고 귀를 바짝 모았다.
(59-60쪽, 「전쟁」)
눈물에 젖은 봉림대군의 두 눈이 무엇에 놀란 양 흠칫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여 거듭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보는데, 이무진이 소스라치며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습니다. 대군 마마! 사람이 살아 있사옵니다!”
소스라친 이무진의 외침보다도 봉림대군의 두 발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그 소녀였다. 시체 더미 속에 버려진 소녀의 손가락이 움찔움찔하더니 이젠 팔꿈치를 들어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빨리!”
봉림대군이 이무진과 정뇌경을 재촉했다. 놀란 여인들이 우르르 쫓아 나갔고 봉림대군과 이무진, 정태화, 정뇌경이 그 소녀를 시체 더미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이었으나 그러나 미약하나마 가느다란 숨결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파랗던 입술도 점차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고…… 소생의 빛이었다. 그런데, 순간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봉림대군의 머리끝이 쭈뼛했다. 소녀가 다름 아닌 권오희였던 것이다.
놀란 봉림대군이 솜두루마기를 벗어 권오희를 감싼 채 어깨와 팔을 문지르며 주무르자 이무진, 정태화, 정뇌경과 둘러선 여인들이 저도 모르게 달려들어 권오희를 감싸 안고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어 들것이 대령했고 권오희는 들것에 실려 다시 천막 안으로 옮겨졌다.
기적이었다. 막혔던 기혈(氣血)이 햇볕에 녹으며 되돌기 시작한 것이었고, 천막 안으로 옮겨진 후 여인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권오희는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깨어나는 권오희를 바라보며 봉림대군은 소현세자가 있는 군막을 향해 걸음을 급히 옮겼다.
(308-309쪽, 「금강산 백의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