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그 후에는 수면제를 먹었고 점차 그 양이 많아져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탈이 났고 몇 번의 응급실행 끝에 이브가 최종적으로 선택했던 방법은 밤을 새우는 일이었다. 장마 기간에 잠들 수 있다는 건 이브에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4년을 버텼다. 그런데 어제는 잠을 잤다. 그것도 아주 푹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뿐함이 느껴지는 몸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브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졌다. 아담 그 녀석 때문이었다. (p. 137)
가까이서 본 영천의 안색은 더욱 형편없었다. 80세 노인의 혈색 없는 얼굴은 왠지 모를 가슴 찡한 죄책감을 만들었다. 아담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 자신의 손바닥에 연결된 건강 프로세서를 가동했다. 그때였다. 영천은 아담의 인기척에 그의 손을 거칠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담은 그저 놀란 눈으로 자신의 곁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영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곤 마치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영천의 눈빛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p. 167)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옮긴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이브는 벌써 4시간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IQ165의 천재 미래학자라는 수식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창의력과 창조이며 우리 생은 새로운 지식을 쌓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유의미해지므로, 죽음으로써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없다는 유세훈 박사의 가치관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논리라면 영천을 설득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이브는 확신했다. 비서관이 문을 닫고 나가자 이브는 조심스럽게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시위대의 정체는 OHC 집단. 이브는 그곳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몇몇의 얼굴들을 기억해 냈다. 영천의 손에 이끌려 몇 번 참여했던 저녁 모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최근 출판된 유세훈 박사의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잉태되는 새 생명-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책을 규탄하고 나섰다. 현재 베스트셀러인 책이었다.(p.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