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뉴스를 보던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몽(如夢)의 배신일 수도 있고 그의 실수일 수도 있었다. 순서가 뒤엉키고 해야 할 일이 새롭게 생겨났다. 식탁에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TV화면에 흉측한 모습의 해골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평범한 사람의 해골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오랫동안 상상 속에서 집중했던 물건이라 깊은 감회가 물씬 몰려왔다.
순간 화면은 쌍계사의 금당으로 바뀌었고 <六祖頂相塔 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는 현판에서 페이드아웃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였다.
( 7쪽, 「노출」)
아내는 화구들을 놓아둔 거실 구석으로 가더니 주섬주섬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요즘 아내는 가끔씩 꿈속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을 화폭에 담곤 하였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사람들의 말소리만 듣고도 얼굴을 그려 내는 독특한 재주가 생겼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다르고 지문이 다르듯이 말소리가 다르다고 했다.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의 얼굴이 자신의 내면에 쑥 올라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으면 그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면서 아내는 틈만 나면 인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모든 사람의 얼굴을 어둠의 저쪽으로 가져가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처럼 혼신을 다해 그렸다.
( 56쪽, 「쿠시나가르광장 1」)
한번은 제가 일이 안 풀려 너무도 괴로워서 스승님을 찾아뵙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죠. 그 때 스승님의 가르침이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우리는 괴로움이 있을 때에 괴로운 내가 괴로움을 말아 내는 것처럼 여기고 나에게서 이 괴로움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이게 착각인 거요. 괴로운 자가 있어서 괴로움을 말아 내는 게 아니라 거기 괴로움이 있을 뿐이오. 한 생각뿐이라서 ‘나’와 괴로움이 같은 거라면 누가 괴로움이라고 이름 짓겠소? 불은 스스로 뜨겁다고 안 하오. 얼음은 스스로 차갑다고 안 하오. 괴로움이 스스로 괴롭다고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라는 게 만들어 놓은 ‘나’가 괴로움이라고 이름을 짓는 거요. 그게 정신분열이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뭇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이라고 여기지만 그게 분열인 거요.”라고 말씀해 주셔서 오랫동안 스승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괴로움을 극복했던 적이 있습니다.
( 113쪽,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