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나 섭섭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반대로 당장의 분노나 섭섭함을 뛰어넘어서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먼저 생각해 준다거나 자신의 분노나 감정을 눌러 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거다.
조금만 참고 생각해 보면 기왕에 지나간 일들에 대한 분노나 서운함을 상대에게 표출함으로써 빚어지는 문제는 어쩌면 백해무익한 것이 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묻어 두고 좋은 얼굴로 상대를 대한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어질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되리란 생각을 한다. 인간관계란 것이 칼로 무 자르듯 당신 같은 인간하고는 절대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절교를 선언해 버리고 싶은 때도 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계속 관계를 이어 가다 보면 더러는 전화위복처럼 더 좋은 관계로 발전되기도 하니 말이다.
어느 책에서 본 글에 사람이 뭔가를 상대로 열심히 싸운다는 것은 그 상대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란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방과 더 얽히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하게 얽힌 실타래는 막무가내로 잡아당기기보다는 살살 달래 가면서 조심스럽게 풀다 보면 어느 순간 쉽게 풀리기도 한다는 걸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을 가진 이는 알고 있다.
(104쪽, 「차마 어쩌지 못하는」 중)
참 많은 날들을 여자는 자신의 원칙을 지켜 주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며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남자가 때때로 들고 들어오는 습득물과 심심하면 만들어 내는 그의 피조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언젠가부터 여자 스스로도 어질러진 잡동사니들과 함께하는 게 거슬리지가 않고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길들여진다는 말을 여자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여자는 집에 대한 생각도 바꿨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과의 타협과 조화가 중요하며, 좋은 집이란 크고 멋있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정을 주는 곳이라야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여전히 길을 가다가 나지막한 울타리에 빨간 넝쿨장미가 열리고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핀 꽃밭과 넓은 유리창을 가진 깨끗하고 예쁘게 잘 꾸며진 단독주택을 보면 멈춰 서서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155쪽, 「그 여자의 집」 중)
‘혼자서 걱정했던 후두암이나 다른 나쁜 병은 아니라니 다행이다.’라는 마음과 함께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동안 내가 너무 말이 많았던가 보다.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쪽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누구한테 지는 걸 싫어해서 끝까지 따지기를 잘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질문은 물론이요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으니, 이제부터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잘하며, 앞에 나서서 질문하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경청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고 기회를 주셨나 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말하고 소리 지르고 노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몰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전혀 몰랐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는 할 줄 알면서 내가 몸으로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주저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204-205쪽, 「노래를 잃어버린 목소리」 중)
너무나 어른스러운 아이의 배려에 나는 과연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그런 배려를 해 본적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을 하게 됐다. 그리고 문득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타인의 마음이나 감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기분, 자신의 욕망밖에 생각하지 않은 모자라는 어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절제와 겸손, 이웃에 대한 배려는 이제 옛 시절의 낡은 덕목이 되고 말았다.
(253쪽, 「어른아이, 아이어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