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잠을 제대로 자 본적도 없습니다. 당신이 천사라면, 나를 구제해 준다는 생각으로 나와 결혼해줄 수 없겠소? 그렇게만 해준다면 당신을 평생 내 은인으로 삼으며 최선을 다하리다. 오네긴 소설을 읽을 때 흥미롭기만 했지, 막상 내가 그 꼴이 되어 보니깐 사랑 병이 이렇게 잔인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지독한 그리움이 뭔지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매일 밤 이 지긋지긋한 고독 속에서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어둠을 헤매고 있답니다.”
(29쪽)
“아∼ 오늘의 이 기분은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진정 사랑하는 사람하고의 섹스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 표정과 행동 하나 하나에서 행복감이 충만해 있었다.
(47쪽)
“그랬었군요. 같은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생각하는 세계가 다르니……당신과 나는 결코 융합될 수 없는 DNA가 서로 다른 게 분명해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개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당신의 일에 일체 관여 안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결혼조건으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그 이유예요. 내 일에 파묻히다 보면 아무래도 당신에 대한 집착에서 멀어질 수가 있겠죠. 저는 유학시절 집착은 불행의 씨앗이라고 배웠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각자의 삶을 서로 존경하는……얼마나 멋있어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요.”
(113쪽)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그런 사소한 정까지 모두 끊으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기엔 임자는 속세로 다시 돌아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김일엽 스님과는 달리 임자에게는 모진 면이 없는 거 같아 보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그러나 저에게도 독한 면이 있어요. 불자로 받아만 주신다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스님!”
(219쪽)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한 여인을 극찬하지. 그러나 10년 후 발표한 <페인트 베일>에서는 키티같은 여인을 경박한 캐릭터로 묘사하지.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밀드레드로부터 처참한 배반을 당한 후 새롭게 안 샐리를 극찬할 때 결혼했다가, 키티를 경멸할 무렵 본부인과 이혼한 후 90세가 넘도록 독신으로 살아가지. 그의 소설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그가 어느 날부터 여성에게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던 거 같아. 그래서 여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이는 없다고 한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