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족은 씨족의 결합체이다. 그러므로 민족사 연구는 씨족 연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곧 한 씨족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씨족사는 한 민족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자기의 선조에 대한 연구는 곧 우리의 민족혼을 되찾는 데 필요불가결의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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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② 집의공執義公 (휘) 자유子由 (자) 희철希轍 (호) 귀은龜隱, 1444(세종 26)~1495(연산군 1) 한림공파
1465년(세조 11)에 나이 스물둘 약관으로 진사가 되고, 3년 후인 스물 다섯 살 때 식년시에 올랐다. 조선조에 이르러 남원양씨로서는 첫 등과다. 처음 관직은 예문관 검열檢閱(흔히 한림翰林으로 불림.)로 사필史筆을 잡았다. (중략)
성종의 나이가 차서 친정親政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이때 한명회는 영의정이었고, 집의공은 사헌부지평이었다. 한명회는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대비에게 대리청정을 거두지 말라고 주청했다. 실권을 넘겨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도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죄가 심히 엄중합니다. 벌을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재상에서 파면해야 옳습니다.” 공은 직격탄을 날렸다.
(70-72쪽)
17世④ 어은공漁隱公 (휘) 사형士衡 (자) 계평季平 (호) 어은漁隱·영하暎霞, 1547(명종 2)~1599(선조 32) 어은공파
어은공은 1579년(선조 12), 서른세 살 때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생원시에 오르고, 9년 뒤인 1588년(선조 21) 식년방 문과에 급제했다. 그로부터 벼슬길에 들어가 군자감직장으로 봉직하던 중, 1590년(선조 23) 배위 삭녕최씨(1548~1590)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2년 뒤, 왜군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온 나라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온 왜군이 침략 보름 만에 한양으로 진격, 동대문을 통해 입성했다. 선조는 허겁지겁 도성을 빠져 나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도 미증유의 국난 앞에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어은공은 이런 전라감사를 서면으로 질책하고, 호남 유림들에게 격문을 띄우는 한편, 남원의 이대윤李大胤·최상중, 삼종제 모정공희적과 함께 담양으로 달려가 고경명高敬命 등과 창의군을 조직했다.
(94쪽)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흩어진 군인들이 의병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이에 따라 1907년에서 1909년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은 가장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다.
이 시기의 일본군을 타격한 전투횟수는 무려 약 2천 7백회, 의병만 해도 약 14만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 항일의병 투쟁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으나, 특히 전라도가 다른 지역보다 전투 횟수나 항일 의병들 수가 압도적일 만큼 저항이 격렬했다. 이 의거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분으로는 남원양씨 춘계공春溪, 윤숙允淑, 춘영春泳을 비롯한 몇 분이 손꼽힌다.
춘계공은 1875년(고종 12), 구림면 국화리에서 절충장군 석민錫民의 큰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2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