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밤이 내린 바다 앞에 있었다.
수평선은 이미 새까맣게 지워진 지 오래라 사실 어디부터 바다이고 어디부터 하늘인지 감은 잡히지 않았다.
빛도, 달도, 별도 없는 오로지 검은 어둠만 웅크리고 있는 바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소금기 젖은 바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지금 시간이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러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숫자로 겨우 헤아릴 수 있는 찰나에 찰나가 더해진 순간만큼 이곳에 있지 않을까 무작정 가늠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일렁이며 빛나는 커다란 누각 한 채가 있었다.
암청색으로 젖어든 수면 위를 밝히며 그의 의식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누각은 자신의 두 눈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서 있는지, 누가 자신을 여기에 데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자리를 지킨 채 누각을 올려다보는 것이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주위에는 오로지 순수하고, 아름답고, 그윽한 빛만 가득하다. 언뜻 보면 형체를 가진 커다란 불덩어리가 일렁이며 타오르는 것 같다. -12쪽
기영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날고기들은 허겁지겁 창가에 몸을 비볐다. 카페의 온기마저도 저들에게는 각별했던 모양이다.
훅-.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안개가 출렁이더니 일대를 울리는 낮고 굵은 고동 소리가 이어졌다. 곧 숲의 그림자 저편에서 거대한 수정고래 한 마리가 치솟아 올랐다. 수정고래는 거대한 그 몸을 이끌고 숲 위를 유영하다가 하늘 위로 긴 곡선을 그렸다. 기영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렸을 적부터 몇 번이고 봐 왔지만, 수정고래에게는 다른 날고기들과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함과 장엄함이 있었다.
보통 수정고래는 숲의 깊은 곳에 머물지만, 추워질 무렵 먼 곳으로 떠나기 위해 이렇게 숲 위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을 부르는 깊고 낮은 노래를 토해 낸다. 이것을 듣고 일대의 수정고래들은 몰려들고, 다 함께 따뜻한 외국으로 향한다. 그래서 도시의 사람들은 수정고래의 노래를 듣고 겨울이 근접했음을 가늠하곤 했다. -15쪽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달그닥 하고 옆구리에 부딪쳤다. 동시에 커피가 새어 나오며 달콤한 냄새가 그의 의식을 흔들었다.
이어서 언젠가 노파에게 들은 적 있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 그걸 마시면 계속 깨어 있을 수 있거든. 절대 붙잡히지 마.
여기까지 생각이 든 기영은 서둘러 커피를 들어 다해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녀에게 일렀다.
“마셔요! 꿈에 붙들려 가기 싫으면!”
다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우선 기영이 시킨 대로 식어 가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커피를 들이마셨다.
그녀가 먼저 커피를 마신 걸 확인한 기영은 서둘러 커피에 손을 뻗었다. 이대로 물살이 휩쓸리기 전에, 꿈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를 써야 했다.
그 순간, 거대한 진동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85쪽
“똑같은 꿈이 아니야. 늘 꾸던 꿈과는 조금 다른 꿈이었어. 처음에 꿈인지도 몰랐어. 아니, 과연 그게 진짜 꿈인지도 모르겠어. 난 분명히 깨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꿈이 현실에 솟아나. 그리고 이제 슬슬 언제부터 내가 꿈에 붙들려 있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어. 지금까지는 잠을 자면 꿈을 꿨는데, 이제는 깨어 있어도 꿈을 꾸게 돼. 아니, 꿈이 경계를 벗어나 나를 잡으러 와. 이러다가 현실의 나조차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 겁나. 어디서부터 꿈이었고, 언제부터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이제 슬슬 헷갈려.
더 무서운 건, 왠지 모르게 내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든다는 거야. 바로 이곳, 이 현실에서 말이야.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과연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정말 다른 곳에 있어야 하는데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일어난 게 아닐까? 사실은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닐까?”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