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화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요. 죽은 사람들은 정말이지 나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이에요. 별다른 유감도 없어요. 생각 좀 해봐요. 별다른 원한도 없는 내가 왜 그들을 죽입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집에 있을지, 땅으로 꺼졌을지. 내가 어떻게 알고.”
게다가 정석화가 생각하기에 의심스러운 이는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 의심스러운 건 403호 집주인 아닙니까?”
“뭐요?!”
갑작스러운 불똥에 403호 집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애초에 발화 지점이 403호라면서요. 그럼 당연히 403호 주인이 불을 질렀다고 보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거기 비워둔 지가 언젠데요. 세입자 나가고 집 정리한 거 외에는 한 번도 간 적 없어요! 의심스러운 건 4층에 사는 사람들이죠. 특히 404호 사람들이요.”(13쪽)
노인네가 전자키 대신 손에 익은 자물쇠로 잠가 놓는 바람에 꼬마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정석화는 밥이나 먹고 한숨 푹 자려던 계획이 글렀음을 직감했다.
“……할머니 전화번호는 알아?”
“응.”
“들어와서 기다릴래? 할머니한테 전화도 하고.”
자신의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꼬맹이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옆집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혁이는 여기서 할머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듯, 제법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제법 진지하고 귀여워서, 정석화는 피식, 웃음이 났다. 환기가 다 된 듯싶었지만, 현관문을 닫지 않기로 했다.
꼬마를 복도에 혼자 두고 문을 닫을 만큼 정석화가 무뢰배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고, 배달 음식이 올 때까지는 열어 둘 생각이기도 했다.(24쪽)
그들이 사는 바른 아파트 104동은 입구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꼭 자신이 가려는 곳이 폭풍의 핵인 것처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겨우 인파를 헤치고 나가 아파트 가까이 갔다. 그리고 봤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바른 아파트 4층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 말도 안 돼 …….”
정석화는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온 401호 의사 역시 넋이 나갔다. 당연했다. 식당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남짓. 그 잠깐 사이에 자신이 사는 곳이 불에 탄 것이다.
“아빠, 불! 불났어. 크와왕, 했어. 우리 집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모든 것을 신기해했는데, 그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다.(중략)
문제는 401호였다.
“어머니!”
401호 의사는 소방관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어머니의 존재를 깨달은 듯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그가 화재 현장을 향해 뛰었다. 아니. 뛰려 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401호 의사를 막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뛰어들었을 터였다.(36쪽~37쪽)
“난 범인이 아닌데 왜 나에게서 증거를 찾는 겁니까?”
집이 멀쩡하다고 범인 취급이라니. 그러고도 의례적?!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답답함이 정석화의 가슴을 옥죄였다.
“아니, 생각 좀 해보라고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방화를 저지르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저 얼굴만 마주친 음식점 사장님, 옆집 사람들이 전부다. 이해관계도 없는데 방화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정석화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자신을 둘러싼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이는 없었다.
“난 정말 아닙니다.”
정석화가 언성을 높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가족을 잃은 4층 거주자 중 한 명인 404호의 미망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의 죽음으로 비탄에 쌓인 미망인의 눈에, 정석화는 이미 방화범인 듯했다.(52쪽)
“사신(邪神)이지.”
704호 박 씨의 말이 식당을 울렸다.
묘하게 음침해진 분위기에 김영환이 침을 삼켰다.
(중략)
“이제 한 3년 되었을 거야. 지금 401호 사는 그 의사 말이야.
그 당시에는 404호에서 살았어. 부인이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는 거 같은데, 갈라서기 전까지 아주 동네가 떠나가라 싸웠다니까. 뭐. 집 나간 애기 엄마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서도.”
사오십 대의 보수성을 겪은 정석화는 501호 석 씨의 말이 의아했기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가다니요?”
“이번에 죽은 노인네, 그러니까 401호 살던 그 여편네 말이 여. 그 여자가 좀 기승스러워야지. 자기 아들 의사라고 며느리를 얼마나 쥐 잡듯이 잡던지, 원. 누가 보든지 말든지 며느리한테 이년, 저년 하는데 우리 딸 결혼해서 그런 시어머니 만날까 봐 겁나더라니까.”
요즘에도 그런 시부모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