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길이 늘 비단길만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겸손이다. 울퉁불퉁 자갈길에 맞닥뜨려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 걷기를 선택하면 된다. 이 길에 함께할 벗이 동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렸을 적, 형제들과 오순도순 걷다 보면 결국은 다다랐던 외갓집 초행길과 같은 거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주변을 돌아보며 조금만 양보하면 의외로 살맛나는 세상이다. ~~~~결국 행복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았을 때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다. 그때부터 날마다 봄날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 참 쉽다.
18, 19 쪽
어렸을 적 새해 달력을 걸 때도 그랬다. 어머니가 의자에 올라 달력을 걸면 아랫목에 앉은 아버지가 지휘했다. “왼쪽, 위로! 오른쪽, 좀 더 아래로!” 의자 위에서는 달력이 비뚤게 걸렸는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다. 어쩌다 어머니 혼자일 때는 몇 차례나 아래로 내려가 살펴보아야만 반듯하게 걸 수 있었다. 내려와야 비로소 보이는 법이다.
35쪽
사랑도 습관이다. 이렇게 정의해 놓으면 눈을 치켜뜰 반론자도 있겠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 흔히들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을 때에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필(Feel)’이 오느니 안 오느니 하며 사랑을 거론한다.~~~얄미운 시어머니가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환하게 웃으며 안마해 주는 것도 사랑이다. 필(Feel)로 하는 사랑보다 내공이 큰 사랑이다. 사랑은 마음뿐 아니라 발품 팔아 온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37쪽
홀로 계신 어머니 댁을 가서도 마찬가지다. 맛난 거 사 들고 가 놓고도 시계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깜짝 놀라곤 한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이제 들어서자마자 “바쁜게 얼렁 가라.”며 밀어낸다. 내 행복한 삶의 원천인 소중한 사람들을 성가신 존재로 돌변시켜 버린 바쁜 일상은 나쁜 일상이다. 오늘은 합격한 그 친구를 불러 놀아야겠다. 그리고 주말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어머니 방에 벌렁 드러누워야겠다.
43쪽
내가 행복하면 내 주위의 평균 다섯 명이 그날 하루, 함께 행복해한다는 통계도 있다. 세상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홀대를 받으면 내가 행복할 수 없고, 누군가 배고프면 함께 슬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우분투(UBUNTU)” 정신으로 나를 비우고 나누면 그만큼 채우게 된다.
69쪽
세월이 역할극을 시킨 듯 나는 엄마, 엄마는 아기가 되었다. 다른 형제들도 뽀뽀를 시작했다. 하는 데까지 해 보자며 집으로 모셔 와 사남매가 케어에 돌입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자 기적처럼 호전되기 시작했다. 혼자서 거동이 가능해졌고 입원 전보다 총명기도 좋아졌다.
나는 이 변화를 ‘사랑의 힘’이라고밖에 설명 못한다. 날마다 네 명의 자식이 드나들며 “쪽! 쪽!” 해대니 정신 줄을 놓을 수 없었을 우리 엄마. 엄마는 뽀뽀를 무척 좋아한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살다간 아이도 엄마 아빠의 뽀뽀 덕분에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고 뽀뽀가 특효약이다.
72쪽
팍팍한 생활에 심술이 난 그녀는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요소를 제거해서라도 행복해지기로 맘먹었다. 나보다 예쁜 년 제명, 만나지 않는다. 능력 있는 년, 남편이 잘해 주는 년, 모두 인간관계에서 제외시키고 나니 한 명도 안 남았다. 홀로 외로운 나날을 보내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급기야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삶의 이슈를 재정비하다 결론을 내렸다. 자신에게 스트레스였던 그년들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는 깨달음이다.~~~그래서 오늘도 운동을 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이지만 즐겁다. 이때의 고통은 단순히 ‘참아 내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운동이 끝난 후의 상쾌함이란 희망이 있기에 가능하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습관, 이것이 내 인생의 버팀목이다.
85, 87쪽
초콜릿을 먹다 운 적이 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함을 전환해 볼 요량으로 초콜릿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달콤함이 혀끝에 감돌자, 초콜릿의 힘을 빌고 있는 자신이 처량해 나도 몰래 눈물이 났다. 이처럼 헤아려 보면 대부분의 눈물은 자신을 위해 흘리고 있다. 억울해서도 울고, 육체적 고통 때문에도 눈물이 나며, 기뻐도 울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은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며 흘리는 눈물이지 않을까. 공감의 눈물에는 다시금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다.
128쪽
군대 간 아들을 그리던 어느 날, 명절맞이 단체 영화 관람을 한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군대 많이 달라졌구나 싶다가 아들과 같이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당찮은 생각은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하지만 나는 즐겁게 반응하기로 작정했다. 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영화 관람하기. 우리는 공간을 초월한 데이트를 즐겼다. 나는 광주, 아들은 파주에서.
즐겁게 행동하고, 그 행동을 즐겁게 바라보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제 더 이상 김장할 기력이 없어진 엄마 때문에 우울해하진 않을 거다. 즐겁게 케어할 거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행복을 찾는 법이니까.
147쪽
최근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더니 온몸에 경보음이 켜졌다. 이전에도 꾸준히 운동을 해왔건만 안 쓰이던 근육들이 적응하느라 아우성이다. 이때는 내 몸이 욱신거리지 않고 편안해질 때까지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살살 근육을 달래야 한다. 근육이 몸에만 있는 것 같진 않다. 삶에도 있다. 사람들은 위기에 직면하면 낙심해 용기를 잃고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런가 하면 위기를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로 바꿔 놓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삶의 근육을 잘 쓰는 사람이다.
156쪽
소문난 맛집으로 갈치조림을 먹으러 갔다. 예약 주문을 하고 갔는데도 기다리게 되었다. 막 짜증이 밀려올 때쯤, 주인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조림냄비를 내려놓고는 “미리 주문까지 하고 오셨는데 많이 늦었죠? 잉?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한다. 순간 잠시 짜증났던 게 미안해져 “맛있는 갈치를 먹으러 온 고객이라면 이 정도 기다릴 자세는 갖춰야지요.” 했다.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간 주인장은 이내 갈치구이 한 토막을 덤으로 내왔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갈치 한 토막으로 돌아온 셈이다.
167쪽
같은 상황에서도 관계를 중시한 쪽과 일을 중시한 쪽의 각기 다른 태도에서 오해가 생긴다. “그 사람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아니야.” 흔히 하는 말이다. 세상에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알고 봐야’겠다. 만사 잘 풀리길 바란다면 속내부터 이해하려 애써야겠다.
178쪽
내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줄 수 있어야 친구다. 그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다. 철학가 한나 아렌트는 “모든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때,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다.
197쪽
하지만 아버지가 하면 ‘말’이 ‘말씀’이 되었다. 아버지의 한마디는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이리 와 앉거라.” 앉으라고 했는데도 무릎을 꿇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고 불같이 성을 내거나 회초리를 드는 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침묵 끝의 아버지의 한마디는 규율이었고 덕분에 우리 사남매는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
228쪽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요가를 할 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듯 들여다보아야 몸도 마음도 건강할 수 있다는 거다. 작가 이윤학은 사랑한다는 건, 서로의 마음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를 향해 질주하다 멈춰 버리면 사랑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예외 아니다. 끊임없이 나를 향해 걸어야 한다.
245쪽
세상에 알려진 성공 사례는 평범한 이들의 기를 제대로 죽여준다. 태생이 소심한데 어쩔 것인가? 이런 예는 동기부여를 받기도 전에 불끈 쥐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게 한다. 이쯤 되면 자기 계발 서적이 아니다. 리더십 강의가 아니다. 나처럼 해 보라며 자랑(질)하는 거나 다름없다. 세상에는 상위 1퍼센트보다 99퍼센트의 사람들이 많다. 평범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하위 1퍼센트로 자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