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당시의 보편적 세계에 충실했지만 후세의 역사관에 의해 억울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역사서를 쓰는 그 시대의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의 성향으로 후세에 미친 결과가 치세의 평가 기준이 되어 콘스탄티누스는 대제로 추앙되었고, 막센티우스는 폭군이자 방탕아로 낙인찍혔다.(103쪽)
카이사르는 술라가 스스로 독재관에서 내려와 은퇴한 것을 두고 정치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갈파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권력이란 한번 잡게 되면 놓고 싶다고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의 이 말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비참한 말로를 살펴보면 심중에 와 닿는 말이 아닐 수 없다.(122쪽)
플라톤이 이르기를 노예로부터 가문이 시작되지 않는 왕이 없고, 왕에게서 가문이 시작되지 않는 노예가 없다고 했다. 가문의 명맥을 이어 가려는 모든 노력도 자손들의 목숨과 가문의 정통성을 지키지 못했다.(147쪽)
갈루스는 도전과 죽음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검을 뽑아야 했다. 행여 용서되지 않을까 하는 미련은 의심 많은 최고 권력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미 혈육을 죽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심약하며 음침하고 폐쇄적이며 잔인했다.(174쪽)
흔히 권력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본질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이는 일반적인 대중이라면 경멸받아야 할 악행도 통치 행위라는 명분 아래 용서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유일하고 지고한 권력자는 항상 정당하다는 것이 콘스탄티우스의 논리였다. (200쪽)
분노가 스미는 일이지만 먼 과거부터 권력과 축재는 떼어 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크건 작건 모든 국가의 공통된 비리를 잉태했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부분의 권력이란 재물과 질긴 고리로 이어져있다. 더욱 가당치 않은 것은 비리를 저지른 자가 자신과 동료들의 축재를 정당성으로 포장하여, 이는 정치적 노력의 산물이므로 용서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는 점이다.(245쪽)
사람의 기질과 성품이란 변하지 않기 마련이다. 루피누스가 그 어떤 달콤한 말로 속삭여도 그의 사악함은 독사의 독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큰 잘못은 교만하고 간악한 술책을 쓰는 자를 중용한 테오도시우스에게 있었다.(319쪽)
여권 신장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 성장과 비례하는 법이다. 로마의 세력이 지중해 전역에 미치자 모든 물자와 자본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부유한 귀족의 딸들은 호화롭게 성장하여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다. 더 이상 그녀들의 남편들은 옛날의 권리를 아내에게 요구하지 못했고 재산 관리의 분할까지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대개 사회 발전에 따른 혜택이 그렇듯이 여권 신장이란 상류층 여성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하층민 여성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미미했다.(351쪽)
결과론이지만 올림피우스는 코앞에 닥칠 미래의 위험을 예견하지 못하고 스틸리코를 제거하여, 자신의 죽음을 자초한 어리석은 자였다. 왜냐하면 현명한 자라면 얼마 후 닥칠 위험을 잴 줄 알아야 하며, 일이 벌어진 후에는 바보도 영리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392쪽)
아이티우스는 처해진 상황에 적절하게 적응하며 그때그때마다 충실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열악하고 위험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심지어 훈족의 볼모가 되었을 때조차 오히려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볼모에서 벗어나서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위기에 닥쳤을 때 훈족의 위세와 무력을 빌렸다. 영악했던 그는 무엇이 옳은 길인가보다는 어떻게 해야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살폈으며, 역경에 한탄하지 않고 폭풍에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412쪽)
유럽 문명을 마련한 로마인들은 그들의 나약함으로 야만족들에게 패배했다. 그 결과 한때 그들이 패전한 민족을 노예로 만들어 가축처럼 부린 것과 같이, 이제는 야만족들이 로마 시민들을 노예처럼 취급했다. 이처럼 문명이나 문화의 우위란 창검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5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