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물개박수가 지나간 손바닥에 보라색 매발톱꽃의 저녁을 그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덤불 타는 냄새가 말 못할 반성을 태우는 것처럼 길고 오래가서 허기가 돌았다
달래려는 맘과 달래지는 맘은 흐르는 물에 씻어도 한 뼘의 걸음이 남아 있었다
새들이 부는 휘파람이 수돗가로 모이고 털털거리며 굴러가는 버스의 꽁무니에선 새끼 어둠이 태어났다
왜 밖에만 나오면 멀리 바라보게 되지, 당신의 말이 더 멀리 가고 있어 출발지에는 지나온 날이 쌓여 갔다
소금기 절은 브라를 벗어 찬물에 담그자 브라는 풍만하고 물컹했고 이따금씩 물 밖으로 삐져나와 검은 물감처럼 풀어졌다
바다에 동전을 던지고 왔으니 잠시 손을 놓아도 속은 훤히 비칠 것이다 당신을 들여다보며 잊을 만한 기분을 나눠 주고 싶었다
평상은 나신처럼 햇빛과 그늘이 번갈아 구부러져도 우리에게 부족한 말이 쏟아져도 소란을 떠난 무늬만 들여다보았다
소낙비를 맞아 볼 걸, 걸어 둔 여름은 또 올 것이다 하룻밤이 오랜 안부를 묻어야 할 시간처럼 왔다
저녁을 짓기 위해 당신의 배낭을 열고 빗소리를 찾았다
(10-11쪽, 「마지막 날에 민박을 하였다」 전문)
세상을 향해
침묵시위를 하던 스크린 도어
어느 시인에게 쉽게 마음 주어 품었을까, 시 한 편
가족으로 시작하는 첫째 연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시를 읊조리며 열어 보는 공구함
자기 몫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공구들이
저들끼리 투덕거리고 싸우다 뒤엉켜 있다
니퍼와 드라이버를 찾아
세상의 등쌀에 홀쭉해진 허리춤에 꽂을 때
뜯지 못한 포장지가 안쓰러운지
컵라면이 울상을 짓는다
이 문을 다 고치고 돌아가면
저 아름다운 시를 어머니께 들려 드려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삐걱거리는 청춘을 수리하는 구의역 9-4 승강장
시의 행간에서 피곤한 눈을 비빌 때
정규직의 달콤한 희망을 가장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디룩디룩 살찐 두더지 한 마리 달려든다
어머니께 들려주고 싶던 마지막 행 글자들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온몸을 파고들었다
알록달록한 열아홉 청춘이
너무나 멀고 어두운 지하철 터널 속에 갇혀 버렸다
내가 더 힘을 내야지
수리공을 잃어버린 스크린 도어가
삶과 죽음의 노란 경계선에 후둘거리는 몸을 기대고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눈물로 뿌리 내린
흰 국화 몇 송이
수리되지 못한 짧은 문장들을
포스트잇에 쓰고 있다
(22-23쪽, 「수리되지 않는 문장」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