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골라 입은 옷은 결국 나 자신이 된다. (중략) 선택된 옷에 대하여는, 일과가 끝날 때까지 기쁘게 동행하는 것이 옷에도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옷은 낡아 가고 나는 늙어 가지만 우리는 늘 좋은 파트너니까.
세상을 사는 일도 옷 고르기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와 손을 잡거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손잡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무조건 싫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고, 내가 싫증이 나서 그를 떠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선택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낡음과 늙음 사이를 잘 조절하면서. (19-20쪽)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가 추자도를 떠났던 그날 밤, 눈물의 십자가는 태풍 솔릭의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에 쓸려 그 바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향한 정난주 마리아의 십자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린 딸들을 두고 이승을 떠나셨던 어머니의 젖은 눈물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듯이….
어느 순간에서도 뜨겁고 강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꾸만 생각나는 오늘, 스물아홉 내 어머니가 지고 가신 십자가가 하얗게 빛나고 있다. (93-94쪽)
다정했던 사람 사이에는 세월도, 얼굴의 주름살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래전 함께 그려 넣었던 추억만이 곱디곱게 살아나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을 뿐이다. 마치 찻잔 속의 마른 들국화가 천천히 피어나며 향기를 전하듯이.
프랑스 속담에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는 종종 추억이 현실보다 선명할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늙을 줄 모르는 추억이 환하게 되살아난 날. (122쪽)
올봄엔 시간이 많아서 꽃들과 자주 눈을 맞추었고, 그들의 삶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비슷한 꽃은 있어도 같은 꽃은 없고, 예쁜 꽃은 있어도 미운 꽃은 없었다. 마치 내 주변의 사람들 같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삶까지 똑같은 사람은 없다. 또 소중한 삶은 있어도 가치 없는 삶은 없는 것 같다.
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도 대부분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이분법적사고도 이젠 바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우리는 꽃보다 훨씬 아름답고 현명하며 귀한 사람들이니까. (172쪽)
어려서부터 말은 사람을 베는 칼이니 잘 골라 써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아직 언어 고르기에 서툴다. 그날 나의 행동은 그분의 마음을 베었고 또 지금까지 내 마음도 베는 중이다.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가 이렇게 오래가다니 뜻밖이다. 남에게 받은 상처만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베인 상처도 참 오래간다는 것을 느낀다. (중략) 누구라도 남에게 칼 같은 말을 던질 자격은 없다는 것과 함께….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