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착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 대신 희망을 택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가정’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인은 평생을 노력해 왔다. 사회의 냉대, 거칠고 험한 일, 보잘것없는 월급 같은 것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인이 기꺼이 감수해야 할 과정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다를 것이라고 노인은 믿었다. 그러나, 노인에게 ‘가정’은 신기루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굳은살과 상처 자국이 가득한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노인은 문득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국은 저 하늘 어느 아래쯤 있을까. - 「김 노인의 추석」 중에서
오는 지상으로 올라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쌀쌀한 공기가 얇은 셔츠만 입은 오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퇴근해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있었다. 오는 이제 더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지쳤다. 설사 더 찾는다고 해도 복권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오는 별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엔가 있을 17억짜리 복권이 오의 눈에 어른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대체 그 복권이 어디 갔단 말인가? - 「행운이라는 것」 중에서
당신은 류를 생각한다. 3년 전 금융기관 임원으로 명퇴한 후 하릴없이 지내던 동창이었다. 매사에 명랑하고 자신만만하던 그는 퇴직 후 갈수록 말을 잃었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야. 가끔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살을 꼬집어 보기도 한다니까. 동창 모임이 있던 날 영등포시장 뒷골목 술집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 「환생」 중에서
문을 열자 거센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검은 바위로 뒤덮인 해안에 파도가 거칠게 부서져 하얗게 물보라가 일었다.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물 알갱이에서는 짭짜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바위 틈새로 드문드문 낚시꾼들이 보였다.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던 뜻밖의 광경이었다. 사나운 파도와 마주한 채 묵묵히 서 있는 낚시꾼들의 모습은 고행을 떠나는 수도승처럼 무겁고 엄숙했다. - 「길었던 하루」 중에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는 거실 한쪽에 있는 어항을 생각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떠난 후 오랫동안 돌보지 않던 어항이었다. 수초가 성기게 자라 어두컴컴한 어항 속은 깊은 바다 밑처럼 적막했고, 죽은 열대어들이 솜털처럼 형해화한 모습으로 수초 사이를 부유하고 있었다. 예감이었을까. 언젠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내 육신도 그처럼 깊은 바닷속을 떠돌아다닐 것 같았다. - 「선상일기」 중에서